밤바다가 보고 싶어 함께 대왕암에 간 적이 있다. 자정을 넘긴 시각, 우리 말곤 아무도 없었고, 거대한 바다만이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파도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 사실이 벅차 눈물도 살짝 흘렸다는 건 안 비밀.
불현듯 ‘옆에 있는 이 사람과 같이 살고 싶다’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문장이 침습했다. 그 마음을 전하고 싶어 한쪽 무릎을 꿇고 장난치듯 물었다. “결혼해줄래?” 그러나 제대로 된 대답을 듣기도 전에 혼자 머쓱해져 그녀를 안아버렸다. 그렇게 중요한 말을 던져놓고는 얼렁뚱땅 넘어가버린 것이다.
그로부터 딱 900일이 지난 2023년 5월 14일.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말을 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장난도 아니었고, 빈손도 아니었다. 이미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 어차피 K-프로포즈였다. 그래도 결혼 선배들은 하나같이 프로포즈는 꼭 해야 한다고 했다. 안 하면 결혼 후 두고두고 얘기 나온다나 뭐라나. 무엇보다 나랑 결혼해주고, 바쁜 나를 많이 배려해주면서 결혼 준비까지 하느라 고생 중인 그녀에게 의미 있는 걸 해주고 싶었다.
결혼 준비를 시작하면서 프로포즈도 같이 고민했다. 후기도 찾아보고, 둘이 갔던 곳들을 떠올려봤다. 나름 의미는 있었는데 딱 ‘여기다’ 싶은 곳은 없었다. 이때, 그녀의 의도치 않은 어시스트가 들어오는데... 어느 날, 당시 인스타에 자주 뜨던 명선도를 가보고 싶다며 링크를 보내줬다. 그 순간, 퍼즐이 파바박 맞춰졌다. “그래. 명선도 갔다가 대왕암으로 유도하는 거야.”
명선도에 들어가려면 물때를 잘 맞춰야 하는데, 마침 5월 중순이 그런 때였다. 서로 일정까지 맞춰보니, 웬걸 5월 14일이네. 로즈데이트 겸 나만의 비밀 프로포즈 대작전을 기획했다. 선물은 생각보다 금방 정했다. 큰맘 먹고 비싼 귀걸이와 목걸이를 골랐고, 프로포즈 때 꼭 주고 싶었던 꽃다발과 편지도 준비했다. 혹여나 꽃다발을 먼저 들키더라도 로즈데이 선물로 생각하게끔 나름의 위장도 해뒀다. 지금 생각하면 꽤 치밀했다.
당일이 되었다. 명선도를 갔다가 바로 돌아가기 싫다는 핑계를 대며 대왕암으로 향했다. 주차하면서부터 떨리기 시작했다. 이제 가방에 숨겨둔 선물을 주머니로 옮겨야 했다. 필요하지도 않은 물티슈를 달라며 그녀의 시선을 돌리고, 그 틈에 선물을 꺼내 오른쪽 주머니에 넣었다. 다시 걷기 시작하자 그녀가 평소처럼 내 오른손을 잡으려 했다. 하는 수 없이 부자연스럽게 왼손을 내밀었다. 왜냐면 오른쪽 주머니에 선물이 있었기 때문에.
대왕암까지 왜 그렇게 멀게 느껴지는 건지... 물론 진짜 멀긴 했다. 긴장을 풀려고 쓸데없는 말을 계속 떠들며 걸었다. 그렇게 대왕암 끝자락에 도착했는데도 머릿속에는 온통 언제, 어떻게 말을 꺼낼지뿐이었다.
그러다 슬쩍 900일 전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그때 여기 왔던 거 기억나?” 내가 물었다.
“그때 자기 파도 소리 듣고 감격해서 울었잖아.”
“그래. 그랬지. 또?”
“파도 소리 좋다고 녹음한 거?”
“음... 또?”
“자기가 무릎 꿇고 장난으로 결혼하자고 했던 거.”
그래, 바로 그거. “그치. 아마 이렇게 했었지?” 그때처럼 다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오른쪽 주머니에 숨겨둔 선물을 꺼냈다.
“나랑 결혼해줄래?”
여기까진 좋았다. 바로 일어서지만 않았다면. 그렇게 준비해놓고 정작 무릎 꿇은 시간은 몇 초 되지도 않았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급했던 걸까.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계획에 없던 2차전도 생겼다. 꽃다발과 함께 사진을 찍으면 좋을 것 같아 물 한 모금 마시자고 꼬셔서 차로 유인했다. 그녀가 조수석에 앉자 준비해둔 꽃다발과 편지를 꺼냈다. 다시 한번, 이번에는 좀 더 길게 무릎을 꿇어 건넸다. 편지를 직접 읽어주고, 꽃다발과 함께 사진도 남겼다. 그제야 긴장이 다 풀렸다. 그녀에게 운전을 맡기고 돌아오는 내내 준비 비하인드를 귀가 따갑도록 들려주었다.
적어도 이번엔 얼렁뚱땅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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