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이를 품고도 최대한 오래 울산에 머물렀다.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은 직장을 무책임하게 그만두고 싶지도 않았고, 자취생활에 미련도 남았던 탓이었다. 입덧과 여러 통증이 나를 힘들게 했지만 내가 감내해야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뱃속에 아이는 큰 이벤트 없이 무럭무럭 자랐다. 이제 대외적으로 우리가 함께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릴 차례였다.
결혼식 당일, 새벽부터 준비했지만 시간이 지체되어 생각보다 예식장에 늦게 도착했다. 아빠는 예식장에서 나를 보자마자 걱정하는 눈빛으로 후다닥 달려왔다.
“안 춥나? 걸칠 거 없나?”
“괜찮아요”
“임마들은 왜 대기실이 여기고? 아무것도 없고 나 참..”
혼잣말로 볼멘소리를 하는 그였다. 당시 드레스가 어깨 라인이 없었고, 4월이었지만 꽃샘추위 때문인지 날이 쌀쌀한 탓이었다. 남편과 내가 야외예식장을 고집한 탓에 대기실 같은 건 없었다. 나는 나를 걱정하는 그가 낯설었다. 그의 서툰 표현방식이 다시 한 번 내 마음을 흔드는 순간이었다.
결혼식을 마무리하고, 1년을 꽉 채워 치열하게 살았던 직장과 자취방을 정리했다. 이런저런 짐들을 차 두 대에 빡빡하게 싣고 나는 대구로 다시 돌아왔다. 남편과는 결혼을 했지만 바로 신혼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입주 전까지 비는 기간 동안 어쩔 수 없이 본가에 머무르기로 했다.
일 년여 만에 본가 생활을 하려니 마음이 불편하고 시끄럽기 짝이 없었다. 고작 일 년 떨어져 지냈다고 집이 바로 낯설어지다니, 참 아이러니했다. 그래도 낮에는 아빠가 없으니 충분히 쉬고 잘 먹고 있다고 스스로 다독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기검진 때마다 병원만 가면 빈혈이 심하다고 했다. 매번 한 시간 가량 철분을 수액으로 맞고 돌아왔다.
엄마가 지나가는 말로 빈혈 이야기를 한 며칠 뒤, 귀가 한 아빠 손에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다. 그는 식탁에 수상한 봉지를 내려놓고 나와 엄마에게 말했다.
“이게 빈혈에 좋다카데. 생으로 묵어봐. 당신도 애한테 이거 매일 챙기줘라.”
“이게 뭐꼬? 아이고, 우설 아이가. 이걸 애가 우째 묵노”
“왜 못 먹노? 참기름에 찍어먹으면 되지.”
그 날부터 나는 우설이라는 걸 처음 먹어보게 되었다. 소의 혀를 생으로 먹으라니 ‘나 참..’ 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안 먹으면 혼날 것 같아 입에 넣었다. 입 안 가득 비린내가 나서 한 번에 많이 먹기가 어려웠다. 도저히 먹기 힘든 날엔 슬슬 눈치를 보며 한 두 번씩은 팬에 구워먹었다. 그런 내 모습이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평생 아빠의 무심함과 인색함에 상처받아 온 내가 비리고 낯선 고기를 거절하지 못하고 입에 넣었던 건 어쩌면 직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넬 줄 모르는 아빠가 내민 사랑의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렇게 열심히 먹은 탓인지, 철분 주사 덕분인지 빈혈 수치는 많이 올라왔다. 이번에는 아기가 작은 게 문제였다. 의사는 산달이 다가오는데 아기가 많이 작으니 수박이라도 먹어 많이 키우라고 했다. 아빠는 그 말을 듣자마자 수박을 짊어지고 왔다. 뚝딱 말만 하면 나오는 도깨비방망이가 따로 없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아빠의 챙김을 받았던 적이 있었던가. 나는 냉장고에 두고두고 수박을 먹으면서도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30년 넘게 서로 표현법을 모르던 부녀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아빠의 노력을 눈치라도 챈 건지 아이는 뱃속에서 다시 커지기 시작했다. 진통이 오면 정상 주수에 출산하자는 말도 들었다. 아이는 아이대로 크는데 신혼집 청소도 해야 했다. 아빠는 그 때도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했다.
“당신이랑 소희(언니)가 더 많이 해야 한다. 배부른 아 시키지 마라. 알긋나.”
“쉬엄쉬엄 하면 돼요. 내가 들어갈 집인데..”
“시끄럽다. 그리고 운전 절대 하지 마라 알긋나.”
진통도 없고 아직 멀쩡한데 운전도 하지 마라니 억울했다.
‘그렇게 걱정되면 본인이 일 하루 빠지고 도와주던가!’ 마음속으로 또 반발심이 들었다.
‘하여간 저 성질머리..’
속으로 혼잣말을 삼키고 묵묵히 운전도, 청소도 했다. 하지 말라는 건 다 하는 나도 청개구리였다. 이렇게 바쁘게 다닌 탓이었을까? 일주일 정도 밤에 가벼운 배 통증이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통증이 찾아왔다. 시간이 좀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괜찮아지겠지 하며 버텼다.
그런데 내 생각이 틀렸다는 듯 통증은 점점 심해져만 갔다. 본능적으로 이건 병원에 가야한다는 직감이 들었다. 어느덧 새벽 세시 반, 분만 병원은 걸어서 십분 거리였지만 도저히 걸어갈 자신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부모님을 깨워야했다.
“엄마... 병원 가야할 것 같아.”
“와이카노? 아이고메. 아직 며칠 남았다 아이가.”
엄마는 사색이 된 나를 두고 아빠를 급히 깨웠다. 아빠도 자다말고 화들짝 놀라 바로 차로 달려갔다. 나는 엄마의 부축을 받아 차에 탔다. 바깥은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다급하게 시동을 거는 아빠의 거친 숨소리만이 차 안의 차가운 공기를 흔들고 있었다. 평생 아빠의 존재로부터 멀어지기만을 바랐던 내가 인생의 가장 위급한 순간에는 결국 아빠의 차에 몸을 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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