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마등
주마등
2026.07.16
아이바·⌛8분

그러고 보면, 할머니는 기억력이 참 좋으셨다.

광복되던 날 마을 어귀 큰 나무 아래서 다 같이 소 잡아먹었던 이야기.
촛농이 이불에 떨어지면서 집 전체를 태울 뻔했던 이야기.
어린 엄마와 이모를 어떻게 탈출시켰는지까지.

수십 년도 더 지난 이야기를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말씀하시곤 했다.

그 많은 기억들 중 어떤 장면이 당신의 마지막 순간에 주마등처럼 스쳐 갔을까.
문득 궁금했다.

할머니의 부고 소식을 듣는 순간 내게도 할머니와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기에.

여담이지만, 아마도 내 기억력은 할머니를 닮은 것이 아닐까.

그중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이름이었다.

어른들은, 심지어 엄마도 가끔 나를 민이라고 부를 때.
할머니만은 늘 나를 상우라고 불러주셨다.
단 한 번도 헷갈리신 적이 없었다.

할머니는 나랑은 크게 할 말이 없으셨는지 전화할 때마다 항상 “누고, 상우가, 엄마 바까봐라보자”라고 하셨다.
나는 장난스럽게 그 말을 참 많이 따라 하곤 했다.

할머니의 된장찌개는 정말 구수하고 맛있었다.
엄마랑 나는 분명 할머니 된장을 받아 쓰면서도 그 맛을 흉내 낼 수 없었다.

온 가족이 다 모였던 칠순 잔칫날도 기억난다.

할머니 집 거실에 걸려 있는, 지금보다 이십 년은 젊은 얼굴들이 빼곡한 그 액자를 볼 때마다 사람 참 많네, 이 사람들이 어떻게 다 모였지,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어릴 때 가족들과 며칠씩 할머니 댁에 머무를 때면 TV도 잘 안 나오고 놀 게 아무것도 없던 시골집이 너무 심심했다.
그래서 집에 가자고, 할머니 집에 가기 싫다고 많이도 그랬다.

그래도 냇가에서 물놀이하고, 텃밭 따라가고, 가을에 감 따는 건 좋았는데.

고2 겨울방학 때 할머니가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내신 적이 있었다.
그때 엄마 잔소리가 줄어서 좋았던 기억이 있다.

생각해보면 할머니는 꼰대는 아니라서 참 좋았다.
엄마가 우리한테 뭐라고 하면, 되려 엄마를 혼냈으니까.

성인이 되고 나서는 혼자서 할머니를 찾아뵐 때가 많았다.
그때는 엄마보다도 내가 더 가까이 살고 있었으니까.

드라이브도 하고, 시장에 가서 국밥을 함께 먹기도 했다.
같이 그림을 색칠할 때면 할머니는 아이처럼 집중하시곤 했다.

학교 과제를 핑계 삼아 할머니를 자주 찾아뵈며 나름 인터뷰도 했었다.

그 시간 덕분에 할머니를 더 잘 알게 되었고, 할머니를 더 가깝고 친근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나만이 가질 수 있었던 행운이었다.

할머니께 당신의 모습을 그려달라고 부탁드린 적이 있다.

그림 속 할머니는 발이 굉장히 큰 사람이었다.
허리가 굽으셔서 가장 자주, 가장 크게 보였던 게 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루는 엄마와 함께 내 원룸에 오셨다.
내가 끓인 김치찌개를 맛있게 드셔주시던 모습이 기억난다.

다미와 사 간 말랑카우를 좋아하시며 입맛이 없어도 잘 드시던 모습도 기억난다.

다미가 여자친구로, 또 와이프로 함께 갈 때마다 할머니는 별말씀은 없으셨지만 늘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곤 하셨다.

보통 할머니들은 손주들에게 “왜 이렇게 말랐냐, 더 먹어라” 하신다는데 우리 할머니는 언젠가부터 내게는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조금 웃기면서도 서운한 기억이다.

엄마가 나에게 “젊었을 때 많이 놀러 다녀라”라고 했을 때, 옆에서 엄마에게 “너도 좀 그래라” 하시던 할머니의 한마디도 생각난다.

그날은 속이 다 시원했다.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보내던 날, 외삼촌들도, 형들도, 동생들도, 이모부들도, 우리 아빠도, 다미도 울었다.

눈물이 없을 것 같던 사람들이 모두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그동안 애써 참고 있었던 거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일을 치르고 나서 어른들께서 말씀하셨다.

“고생했다. 고맙다.”

어른들에게는 엄마였겠지만, 나에게는 나의 할머니였다.
그래서 나의 할머니를 잘 보내드리고 싶었다고 말씀드렸다.

처음 부고 소식을 들었던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울컥하기도 하고, 소리 내어 울기도 했다.

그러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던 이들을 위해 눈물을 참기도 했다.

아마 한동안은 계속 그런 날들의 반복일 것이다.

그래도 내일이면 일상으로 돌아가 미뤄두었던 다른 역할들을 수행해야 하기에 이 글을 쓰며 마음을 추스르려 한다.

잘 가요. 사랑해요, 할머니.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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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바
안녕하세요. 아이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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