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싶었다. 그러나 부모님의 생각은 내 바람과는 반대였다. 어머니는 청소년기를 한국에서 보내야 한국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나는 중학교로 진학할 즈음이 되었을 때 한국으로 귀국해야 했다.
2009년까지는 애들끼리 한국의 공기놀이, 필리핀식 공기놀이인 잭스톤 그리고 체스를 하며 놀았다. 가끔 PSP를 가져온 친구가 있으면 스트리트 파이터와 마리오 카트를 돌아가면서 했다. 2010년이 되자 한 한국인 친구가 갤럭시 S와 아이팟 터치를 학교에 들고 오기 시작했다. 난 처음 만져본 스마트 기기에 감탄했다. 그리고 성적이 부모님이 약속한 점수보다 높게 나왔고, 부모님은 보상으로 내가 원하던 아이팟을 필리핀에서 돌아오기 직전에 사 주셨다.
그때 내게 애플이라는 기업 그리고 CEO였던 스티브 잡스의 철학과 그 당시 애플의 기기 디자인을 전담하던 조니 아이브의 아이디어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시간이 날 때마다 도서관과 서점에서 스티브 잡스의 자서전과 그에 관련된 책들을 찾으면 읽어내려갔다. 새벽 2시에 캘리포니아에서 진행하던 애플 제품 발표를 챙겨 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해 10월 스티브 잡스의 부고가 들렸다. 그리고 두 달 뒤 북한의 김정일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한국의 모든 미디어를 뒤덮었다.
한국의 중학교에 적응하기는 정말 어려웠다. 반친구들은 학교가 끝나면 모두 학원으로 향했고, 학원을 다니지 않았던 나는 필리핀에서 공부하던 것처럼 집에 돌아와 책상에 앉아 교과서를 읽고 학교에서 나눠준 학습지만 공부했다. 그러나 수성구에서 학원은 곧 친구를 사귀는 공간이기도 했다.
나는 시간이 몇 주 지나도 같은 교실의 대부분의 애들이 낯설었지만, 같은 학원을 다니던 애들은 이미 무리를 지어 다니고 있었다. 쉬는 시간이 되면 학원 학습물을 들고 어떻게 문제풀이를 했는지 토론을 하던 무리가 있는가 하면, 학교 운동장에서 운동을 하며 친해진 애들끼리는 축구공을 들고 시간만 나면 운동장을 뛰어다녔다. 나는 어디에도 끼지 못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런 고민을 갖고 있던 나에게 내 성격이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축구를 하는 애들에 섞여보려고 했다가 그 당시 유행하던 말인 „나대지마“에 상처를 크게 받아서 나와 다른 에너지를 가진 애들과 섞이기를 포기했다.
학원에 다녀볼까 했지만 그 당시 직장일로 바쁜 어머니와 아버지는 수성구 아이들의 부모님처럼 내 학업에 관심을 가지지 못 하셨다. 나 스스로 학원을 찾아오라고 하던 어머니의 말에 주변에서 공부 꽤나 하던 친구들에게 학원을 물어보고 했지만 어떤 기반도 없던 내게는 학원 들어가는 과정도 너무 복잡했다. 그래서 쉬는 시간마다 학교 도서관으로 갔다. 물리학이라는 학문이 좋았고 더 알고 싶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물리학과 관련된 과학잡지와 책을 찾아 읽고, 관심있는 내용을 갖고 다니던 수첩에 베껴 적는 게 일상이었다.
학교는 수성구였고 임시로 마련한 원룸도 수성구에 있었지만 본가는 여전히 달서구였다. 사랑하는 두 강아지는 여전히 본가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학교가 끝나면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본가로 향했다. 달팽이를 잡으러 다니고 필리핀에 가기 전까지 다닌 초등학교가 있는 곳. 그러나 귀국한 후의 달서구는 익숙한 공간이었지만 동시에 낯선 공간으로 변했다. 같이 초등학교를 다니던 친구들과는 서먹해졌고 그 친구들과 다른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다시 연결될 기회도 잃어버렸다.
그래서 학교 공부와 독서 그리고 영화 감상에 내 대부분의 시간이 들어갔다. P2P 사이트를 통해서 밤마다 새로운 영화를 찾아봤다. 지하철을 타고 통학할 때는 지하철 안 서늘한 푸른 빛 아래에 서서 책을 읽었다. 아이팟은 있었지만 데이터 연결이 안됐기 때문에 집에서만 쓸 수 있었다.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더 많은 시간 독서를 할 수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가다 주위를 둘러보면 그 당시에 이미 신문을 읽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폰 4세대 그리고 갤럭시 S2를 든 어른들과 중고등학생들은 데이터 연결로 인터넷 서핑을 하거나 유튜브로 영상을 보고 다녔다.
2012년 런던 올림픽이 열릴 때, 우리 가족은 달서구 집에서 밤마다 TV 앞에 누워서 올림픽 경기를 봤다. 한낮의 더운 공기는 밤 10시가 됐을 땐 조금씩 시원한 바람으로 바뀌었다. 베란다 창문을 열어놓기만 해도 식은 바깥 바람이 찌르르거리는 귀뚜라미 소리를 싣고 거실을 지나갔다. 그때 대구는 여전히 한국에서 제일 더운 도시라고 명성이 자자했지만 그래도 33도~35도를 넘는 날이 열흘을 넘지는 않았다.
중학교 2학년이 되고 처음 아이폰을 받았을 때는 애써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모두 읽고 난 후에는 활자에 지쳐버렸던 것 같다. 그래서 책 대신 핸드폰으로 인터넷 뉴스를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책보다 스마트폰을 손에 더 오랫동안 들고 통학을 하고 있었다. 데이터 용량이 적어서 영상을 보면서 다니진 못 했지만 인터넷에는 영상 말고도 읽을거리와 놀거리가 즐비했다.
부모님은 내가 중학교 2학년 중반 쯤에 본가도 수성구로 옮기셨다. 이사 온 집과 수성구 학원거리가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학교에서 저녁 방과후를 마치고 자전거를 타고 돌아올 때면 알록달록한 학원 간판들이 걸린 건물에서 내 또래학생들이 줄지어 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일부는 귀가를 하려고 버스 정류장에 서있었고, 또 다른 일부는 데리러 온 부모님 차에 탑승하는 모습이 보였다. 송원학원 앞을 지날 때면 재수를 준비하는 형 누나들이 길가에서 담배를 피우며 한숨을 쉬었다.
학원에 다니지 않았던 나는 이 모든 게 익숙하지만 낯설었다. 학원을 다니고 싶은 마음이 있지는 않았지만 역시 뒤쳐진다는 불안도 공존했다. 과학고 진학을 희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학교 2학년이 끝나갈 즈음에 내 성적이 지원할 만큼 잘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했다. 이때 친해진 친구와 고등학교 진학을 두고 같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 경신고등학교가 대구에서 명문 자율형 사립학교로 유명했다. 경신고에서 서울대학교로 5명이나 진학했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경신고로 진학하고 싶어했다. 우리는 그리고 다른 지역에 있는 자사고 그리고 수성구 내에서 명문이라 불리는 고등학교들과 과학고까지 우리는 어디로 지원서를 내야 할지 고민했다. 우리는 어느 고등학교로 진학해야 내가 좋아하는 물리학과 내 친구가 좋아하는 수학을 제대로 공부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내 친구는 매일 같이 학원을 다니고 있었던 반면 나는 학원을 안 다녔기 때문에 학교에서 입시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저녁 늦게 카카오톡으로 입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교외대회에 나가 수상하고 학교 대회에서도 수상하는 등 준비했지만 중학교 2학년이 되고 부진을 겪으며 대구과학영재고는 이미 물 건너갔다는 것을 알았다. 그 때문에 대구일과학고등학교에 지원서를 넣어야 할지 아니면 일반고로 진학해서 수시전형을 노려야 할지 우리는 각자의 생각을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