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정수리
엄마의 정수리
2026.06.22
아이바·⌛7분

중학교 1학년 여름이었던가. 하굣길에 엄마와 나란히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문득 엄마를 바라보다가 정수리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으로 엄마를 내려다본 날이었다. 가끔씩 흰머리를 뽑아 달라며 엄마가 내 앞에 앉아 있던 적은 있었지만, 길 위에서 마주한 느낌은 전혀 달랐다.

기분이 묘했다. 친구들이라면 키가 컸다며 신나했겠지만, 내게는 왠지 모를 책임감부터 밀려왔다. ‘아, 이제 내가 엄마를 지켜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슥 스치고 지나갔다. 아마 어릴 때부터 들어온 아빠의 말 때문이지 않았을까.

“아빠 없으면 네가 가장이니까, 엄마랑 동생은 네가 지켜야 돼.”

아빠에게 고정적인 수입이 생기기 전까지 우리 집은 참 많이 힘들었다. 원래 타지에서 태권도 사범으로 일하시던 아빠는 치매를 앓던 할머니가 곧 돌아가실 거라는 소식에 결국 고향으로 내려오셨다. 하지만 어느덧 타지가 돼버린 고향에서 아빠는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미취학 시절 내 기억 속 부모님은 참 바쁘게 이것저것 하셨다. 지금도 기억나는 게, 아빠가 냇가에서 고디를 잡아 오시면 엄마가 시장에서 그걸 팔았다. 아니, 사실은 내가 거의 다 팔았다. 깨끗이 씻은 고디를 고무다라이에 담고 시장 안 슈퍼마켓 앞에 늘 좌판을 깔곤 했다. 그 시절 우리 엄마는 수줍음이 많았다. 게다가 동생까지 포대기에 업고 있으니 장사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옆에서 깡충거리며 목청을 높였다.

“고디 사가세요! 우리 아빠가 잡은 거예요!”

트럭에 계란을 싣고 팔러 다니기도 했다. 포터에 다 같이 끼어 타고 가파른 산동네를 돌아다니던 기억이 아직도 어렴풋이 난다. 계란이 깨질까 봐 엉금엉금 기어가던, 녹색 갑바를 두른 흰색 포터 차. 그 차가 우리 동네를 지날 때면 괜히 고개를 돌렸다. 친구들과 놀고 있는 나를 보고 아빠가 창문을 내려 이름을 부를까 봐, 어린 나는 그게 그렇게 부끄러웠다.

여섯 살 때쯤 아빠가 처음으로 아파트 공사 일을 시작하시면서 우리 가족도 겨우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은 그 아파트에 입주했고, 나는 그곳에서 초등학교에 들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12년을 살았다. 정작 아빠는 자신이 직접 지은 그 집에 손님처럼 왔다 가곤 했다. 다 합쳐서 1년은 사셨으려나.

아. 오해하실 수도 있는데, 돌아가신 건 아니다. 아빠는 늘 기러기 생활을 하셨다. 광주, 대전, 부산, 대구, 인천, 서울 등지에서 지하철역 공사 일을 하시느라 항상 숙소에서 지내셨다. 건설 일이라는 게 그렇다. 일주일에 한 번 집에 오면 다행이고, 한창 바쁠 때는 몇 달 동안 못 보기도 했다. 날씨가 안 좋아서 공사를 쉬어야만 아빠를 볼 수 있었다. 여행도 그때 갈 수 있었다. 우리에게 휴가란 장마철 혹은 한겨울이었다. 수능을 100일 앞둔 고3 때도 장마철에 전국 여행을 다녀왔다. 모든 건 아빠의 스케줄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보통은 엄마와 나, 동생 이렇게 셋이서 시간을 보냈다. 학창 시절 사진첩에는 언제나 세 명만 찍혀 있었다.

아빠가 없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머릿속에는 “내가 가장이다”라는 말이 조용히 자리 잡았다. 그래도 초등학생 때까지는 엄마보다 키가 작았으니, 가장이라는 게 괜히 권력 같고 좋았다. 하지만 중1 여름, 엄마보다 키가 더 커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그 순간, 가장은 더 이상 권력이 아니었다. 책임감이었다.

내려다본 엄마는 생각보다 작았다.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보호막일 줄 알았던 엄마가, 이제는 내가 지켜줘야 할 사람처럼 느껴졌다.

중1 여름, 엄마의 정수리는 어른아이를 만들었다.

시리즈 전체보기
author
아이바
안녕하세요. 아이바입니다.
작성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