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금강과 한강
III.금강과 한강
2026.09.06
시메트릭·⌛15분

대학교 기숙사는 2인 1실이었다. 처음 기숙사를 신청할 때 높은 곳에서 대학 주변에 펼쳐져 있는 도시를 내려다 보고 싶어서 일부러 12층을 골랐다. 비록 방을 공유하던 타학과 친구가 방 청소를 전혀 하지 않아서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더러운 세면대에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세안을 하고 아침 7시에 햇빛이 도시를 비추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매우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기숙사에서 나와 낮은 언덕을 내려가서 10여분 정도 걸으면 물리학과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1학기에 나는 일반 물리학 실험 강의 뿐 아니라 화학 실험 그리고 생물학 실험 강의를 들었다. 고등학교에서 생물학은 배운 적이 없었으므로 식물의 대사과정에 등장하는 화학 반응식을 계산으로 풀어내는 일은 정말이지 익숙하지 않았다. 매주 평일에는 세 개의 과학 실험 보고서와 과제를 하다 보면 주말이 되어 있었다. 물론 주말에도 대학에 남아서 수학과 물리학 계산 연습을 해야 했지만, 나는 주말만 되면 서울로 올라갔다.

친척 어른들은 매주 금요일이 되면 주말에 서울로 올라오라고 같이 어디 가보자고 연락을 주셨다. 서울로 대학을 못 간 것에 대한 보상심리도 있었고 서울은 대체 문화적으로 얼마나 발전되어 있는지 궁금했다. 친척 동생도 중학생이었는데 그때만큼 서로 이야기를 많이 나눈 시기가 없었다. 광장시장의 빈대떡, 경복궁 옆 서촌마을에 있는 통인시장의 기름 떡볶이, 대림동의 중국 음식들과 중식 식재료를 파는 시장 그리고 인사동, 여의도, 한강공원.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 정도가 모여사는 수도권의 중심인 서울에서는 곳곳에서 새로운 볼거리를 마주칠 수 있었다.

한강공원에서는 대학생들이 모여서 만든 밴드가 버스킹을 하고 있었다. 인사동에서는 미술대학에 다니는 대학생들이 팝업 스토어를 열어서 직접 만든 예술품들을 팔고 있었다. 또한 역사를 좋아하는 내게 서울은 역사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5대 궁궐과 풍납토성, 낙성대 남은 고려시대의 흔적. 문화적 접근성만 높은 것이 아니라 과학 분야 모임도 서울에서 이뤄졌다. 내가 고등학생 때부터 소속되어 있던 온라인 과학 모임이 대학에 입학한 해에 첫 세미나를 세종대학교에서 열었다.

세미나에서는 비트코인의 급격한 가치 상승을 두고 미리 사 두었어야 했다며 당시 서울대 석사생과 미국 대학에서 갓 박사과정에 진학한 형들의 한탄이 이어졌다. 당연히 그때 세미나에서 집중적으로 다뤄지던 주제는 비트코인의 기반이 되는 블록체인 기술이었다. 그리고 분야가 달라도 그렇게 모인 석사 및 박사과정을 밟던 형들은 서로의 분야에 대한 교류를 이어갔다. 이제 막 대학교에 입학한 나는 세미나 발표를 듣고 궁금한 것들만 질문하는 수준에 그칠 뿐이었다.

학술, 사회문화 그리고 음식 문화마저도 서울이라는 도시에서는 모든 게 당연한 일상 안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내 대학이 있는 도시와 내 고향인 대구에서는 해외대학 및 국내대학 가리지 않고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재미삼아 자발적으로 모이는 모임을 찾는 건 상당히 어려웠다.

서울이나 대구로 내려가지 않는 주말에는 대학이 위치한 도시를 돌아다녔다. 그래도 이 도시 상권의 중심이라는 곳을 돌아봤지만 주말의 서울 거리처럼 사람이 많지 않았고 상점이 줄지어 있는 거리에는 버스킹을 하는 또래는 한두 팀만 있었다. 몇 점포를 건너면 임대 현수막이 걸린 상점 건물이 한두 곳 보였다. 서울에서는 곳곳에서 볼 수 있던 팝업스토어나 버스킹 공연은 이곳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나는 왜 이 도시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주말이 되면 1시간 정도면 도착하는 서울로 가는지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해의 여름은 무척이나 더웠다. 여름방학 동안 기숙사에서 지낼 수 없었기 때문에 모든 짐을 들고 대구로 내려와 있었다. 대구의 기온은 심심하면 40도에 육박하는 날이 하루 건너 하루 이어졌고, 밤에도 열기가 식지 않아서 집 옆에 흐르는 신천에 나가서 걷기만 해도 땀이 뻘뻘 나는 상태로 집으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방학 도중에 대학을 방문해야 해서 들렸을 때에도, 시내버스에서 내려서 대학 정문을 지나칠 때부터 이미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학과 사무실을 방문했다가 오후 2시에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이 열기를 뚫고 어떻게 집으로 가야 할지 막막해졌다.

2학기가 시작되고 다시 기숙사에 들어갔다. 입추 후 몇 주가 지나고 절대 끝날 것 같지 않던 극심한 열기의 자리를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선선한 바람이 대체했다. 나중에 독일로 물리학을 공부하러 갈 생각이 확고했기 때문에 독일어 강의도 수강했다. 방학 동안 대구에서 독일어 학원을 다녔더니 어렵지 않았지만 대학을 다닐 정도로 독일어를 배우기 위해선 난이도가 너무 낮았다.

추석 2주 전에 어머니는 나에게 독일에서 공부하는 누나가 잠깐 한국에 왔는데 한 번 독일어 배워보겠냐고 물어보셨다. 마침 그 누나는 내가 선망하던 대학교를 다니던 학생이었다. 그리고 독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던 분이어서 독일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했다. 나는 흔치 않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누나한테 배우고 싶다고 바로 말했다. 매주 나는 비싼 기차 대신 버스를 타고 3시간이 걸려도 대구에 내려가기로 했다. 버스 안에서 물리학과 수학 과제를 하고 주말 하루는 독일어를 배웠다.

어머니는 내게 누나가 10월에 독일로 돌아가는데 독일어를 계속 배우고 싶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독일어를 제대로 배우려면 누나한테 배우는게 나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나에게 아니면 바로 독일 대학에 진학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다. 마침 내가 선망하던 독일 대학에서 누나가 공부하고 있기도 했고 독일 대학 입시를 준비하기에 적절하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누나도 도와주겠다고 말을 해주기도 했다.

나는 일단 카투사 지원 결과를 보고 결정하겠다고 답을 미루었다. 9월 중순에 지원했던 카투사 결과가 11월 초에 나왔다. 토익 900점을 한참 넘은 점수여도 카투사는 점수에 크게 상관없이 무작위로 선별했기 때문에 나는 탈락했다. 당시에 나는 앞으로 5년을 1차원 표에 그린 뒤 당장 독일로 가서 입시를 준비하는 경우와 군대를 가는 경우를 저울질했다. 내가 지원하려던 독일의 물리학 학사과정은 6학기제이므로 비록 한두 학기 더 하게 될지라도 석사 과정을 시작하기 직전에 군대를 가는 게 가능했다.

그럼에도 나는 한국에서 학부를 마치고 석사를 가는게 낫겠다고 어머니에게 나의 생각을 전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렇게 할 바에야 지금 도와줄 사람이 있을 때를 이용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나에게 생각해보라고 조언했다. 아버지는 군대를 마치고 가는게 낫지 않겠냐고 첨언을 했지만 어머니는 한 번 내가 어머니 말대로 하겠다고 말을 하자마자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마치 재고해볼 기회조차 아깝다는 듯 출국날이 내 코앞에 다가왔다.

독일에서의 삶을 준비하기에 3달 남짓은 너무나 짧았다. 대학교 강의에 참석할 시간도 없이 나는 하루 종일 독일어만을 붙들었다. 준비기간이 짧았고 선택과 집중이 중요했다. 누나는 내가 한국 대학에서 1년만 다니고 독일 대학에 지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 대학 성적에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독일어 단어를 외우고 점심을 먹고 저녁을 먹기 전까지 문법 연습문제를 풀고 배운 단어로 글씨를 연습했다. 중간고사 때 성적은 동기들 중 세 손가락 안에 들었지만 그 후로 강의를 빠지고 기말고사를 치지 못 했기 때문에 2학기 성적표는 처참했다.

그러나 독일어는 단기간에 어학수준 체계로 B1, 즉 중급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해 3월에 인천국제공항에서 아버지와 함께 캐리어 4개를 끌고 중국 동방항공 비행기에 올라탔다. 우리는 새벽 4시에 베이징 국제공항에 도착해서 전등도 안 켜지고 문을 연 상점도 없는 공항 안에서 6시간을 대기하다가 뮌헨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시리즈 전체보기

댓글 0

author
시메트릭
안녕하세요. 시메트릭입니다.
작성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