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닐라 한인사회에서 유명한 의사였던 이모부도 일요일이 되면 집에서 쉬셨다.매주는 아니었지만, 때때로 일요일에 차를 타고 식구 전체가 2시간은 족히 걸리는 따가이따이에 바람을 쐬러 갔다. 그날에는 구름이 두껍게 끼어있었다. 그래도 예보상으로 오후에는 비 구름이 걷힐 것이란 것을 보고 우리는 차를 타고 따가이따이에 가기로 했다.
차를 타고 나오자마자 비가 쏟아졌다. 이모가 마침 마닐라 내 들려야 하는 곳이 있어서 우리는 고속도로에 오르기 전 차를 세웠다. 고가도로가 하늘을 일부 가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먹구름이 짙게 껴서 어두운데 더욱 빛이 잘 안 드는 도로가에 잠깐 차를 댔다. 차 밖을 봤을 때 필리핀 아이들이 차도 가장자리에 생긴 포트홀에서 물장난을 하고 있었다. 비는 계속 쏟아지고, 도로 위로 차는 계속 지나갔지만 아이들은 물이 찬 포트홀에서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물을 뿌리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7080 트로트가 흘러나오는 카세트 테이프가 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계속 돌아갔다. 큰 누나는 DJ DOC의 신당동 떡볶이 노래에 흥얼거렸다. 고속도로에 오를 때 쯤에는 서서히 구름이 걷혔다. 고속도로는 콘크리트로 지어져 허여멀건 빛깔이 났고, 고속도로가 아닌 곳은 모두 열대수목들이 빽빽하게 공간을 메웠다. 그리고 고가도로가 우리가 달리는 고속도로 위를 지나가는 게 보였다. 큰 누나는 틈틈이 나와 누나에게 말도 걸고 차 안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갓 들어간 대학교 이야기도 하고, 내가 다니던 학교 이야기도 했다.
중간에 들린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었다. 나와 누나가 가장 좋아하던 건 졸리비의 스파게티와 튀긴 닭다리 한 조각 세트였다. 큰 누나도 졸리비를 가면 햄버거보다는 밥과 그레이비 소스 그리고 닭다리 한 개가 같이 나오는 세트를 좋아했다. 그리고 어른들은 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과 따뜻한 물 한 컵을 받아서 희석해서 마시면서 운전을 이어갔다.
내가 기억하는 따가이따이는 화창한 날보다 구름이 낀 날이 훨씬 많다. 그날도 화창했던 고속도로 위와 달리 따가이따이에 들어서자마자 다시 하늘이 어둑해졌다. 도시화된 마닐라와 달리 따가이따이에는 자연이 훨씬 많이 남아있었다. 고속도로에서 내려와 산을 타고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달리다보면 코코넛 나무, 바나나 나무 그리고 파인애플이 대규모로 심겨진 농장들이 산등성이 아래로 보였다. 그리고 낮은 키의 식물들 사이로 중간중간 슬레이트 판자를 지붕으로 올린 집들이 보였다.
길가에 벽돌로 지어진 웅장한 대문이 보이면 십중팔구 부호들이 자주 찾는 호텔이거나 골프장이었다. 우리는 조금 더 운전을 해서 칼데라 위에 떠있는 화산섬인 따알 화산 전경을 볼 수 있는 스타벅스를 찾았다. 2023년에는 확장되어 규모가 더 커졌다고는 하는데, 이 당시에는 2층짜리 자그마한 스타벅스 가게였다. 이때도 이미 유명한 관광지였던 가게 내부는 관광객들로 꽉 차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마실 것만 사서 바로 옆에 있는 전망대에서 서서 음료를 홀짝였다.
우리는 전망대에서 구름과 물안개에 가려진 따알 화산 쪽을 바라봤다. 양옆으로 열대나무와 수풀들이 우거져 있는 산등성이가 펼쳐졌다. 정면으로는 산비탈이 가팔랐다. 조금 더 멀리 바라보니 호수가 넘실거렸다. 그러나 호수 중간에 있는 화산은 볼 수 없었다. 이모, 이모부 그리고 큰 누나는 다소 아쉬운 말을 했지만, 나와 누나는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우리는 아파트를 벗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해방감을 느끼고 있었다.
평소보다 누나는 들떠있었다. 나는 신나서 장난끼가 많아진 누나를 상대하다 질려버렸다. 누나가 큰 누나에게 사진 찍어달라고 돌아다닐 때 나는 스타벅스 지붕 너머로 보이는 호수와 전망대에 몰려있는 관광객들을 구경했다. 이모부는 나의 말동무가 되어줬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모부는 미모사를 가리키며, 건드리면 잎이 움츠린다며 시범을 보이셨다. 나는 그 후로 미모사가 보이기만 하면 한 번씩 건드리면서 돌아다녔다.
그리고 우리는 소고기 도매시장으로 이동했다. 따가이따이에 자주 왔던 이유 중 하나는 이모가 여기 시장에서 소고기와 소뼈를 사서 식구 전체를 먹일 곰국을 끓이곤 했기 때문이다. 화창한 날은 아니었지만, 곰국을 끓일 재료를 사기 위한 것이 따가이따이에 오기로 가장 큰 이유였다.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 고기 상태도 물어봐야 하지만, 이모께서는 영어로 완전한 문장을 구사하시지 못 하셨기 때문에 나를 데리고 시장을 돌겠다고 하셨다. 시장에 도착할 무렵에는 서서히 빗줄기가 내리고 있었다.
나머지 식구는 차 안에서 이모부와 대기했다. 시장은 넓은 공터에 지붕만 얹어놓은 1층짜리 강당 같았다. 그 시장에서는 현장에서 소를 도축하기도 했기 때문에 피지린내가 사방에서 풍겨오고, 시장바닥 곳곳에 버려진 소 부속이나 소의 피가 남아 있었다. 버려진 소의 부속 위로 파리가 들끓었다. 이모와 나는 비가 내리는 도축시장을 돌면서 질 좋은 소고기와 소뼈를 샀다. 한 상점 앞에 놓인 나무 그루터기에 필리핀 전통칼 볼로가 꽂혀있기도 했다. 손님이 소고기 한 덩이를 잘라야 할 때마다 가게 주인은 소 다리나 갈비뼈를 통째로 들고 내려와 나무 그루터기에 올려놓고 볼로로 내려치면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상점 주인들이 영어를 잘 구사하진 못 했다. 따갈로그어와 영어가 섞인 따글리쉬로 말을 하면 나는 몇 개 아는 따갈로그어 단어와 영어로 이모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했다. 고기를 산 뒤 이모와 나는 시장을 더 돌았다.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모부가 차를 끌고 근처로 오길 기다리던 중이었다. 시장의 한 구석에서 사람들이 투론이라고 불리는 춘권피에 바나나를 말아 튀긴 뒤 카라멜화된 설탕을 뿌린 음식을 먹고 있었다. 이모는 나와 누나에게 먹어보라고 하나씩 손에 쥐어주셨다.
트렁크에 소고기를 다 실었을 때 나와 누나는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했다. 마침 시장에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주차장에 차를 대고 이모부는 나와 누나를 데리고 화장실로 갔다. 깔끔하지 않은 시골 공용화장실을 들어가려고 하자 화장실 입구 앞에 앉아있던 아저씨는 따갈로그어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이모부도 처음엔 못 알아들었다가 그 아저씨의 손짓을 보고 그 앞에 놓여있던 분홍색 플라스틱 바구니에 3 페소를 넣어줬다. 이모부, 나 그리고 누나를 위한 화장실 사용비였다.
돌아가는 길에 우리는 따가이따이 시내를 들렸다. 따가이따이에 들릴 때 한 번씩 사가던 부코파이를 사기 위해서였다. 나는 글을 적는 현재까지도 이 부코파이를 그리워한다. 코코넛 속살을 파이반죽 안에 넣고 구워낸 파이인데, 열이 가해져 약간 흐물흐물한 코코넛 속살과 바삭하고 달달한 파이반죽이 정말 맛있었다. 단골 가게에 들러 우리는 부코파이 다섯 박스를 사서 차에 타고 다시 마닐라로 돌아가는 도로를 탔다. 이미 해가 지고 있었고 어두워진 도로 위에는 차 불빛만이 보였다.
해가 진 뒤 차를 타고 도로를 달리면 차 앞유리에서 툭, 툭, 투둑 소리가 계속 났다. 저녁을 먹기 위해 휴게소에서 내려서 차 앞면을 보면 벌레가 빠른 속도로 달리는 차와 부딪혀서 생긴 자국 그리고 좀 큰 벌레는 사체의 일부가 차 앞에 짓이겨진 채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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