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소설>
프롤로그: <소설>
2026.09.12
교오·⌛15분

가게 안은 늘 같은 냄새였다. 묵을 쑤는 냄새, 오래된 나무의 냄새, 그리고 시간이 고여 있는 냄새. 동현은 주걱을 들어 올렸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묵이 식어가는 속도는 이상하리만큼 일정했다. 마치 이미 정해진 결말을 향해 흘러가는 것 같았다.

"불 줄여라. 너무 세다."

병원에서 돌아온 지 이틀째, 아버지는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아버지의 몸은 절반쯤 무너졌지만 가게에 대한 감각만큼은 아직 살아 있었다.
동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불을 줄이지도 않았다. 그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생각했다. 이 냄새 속에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자신은 끝내 아무것도 쓰지 못할 것이라고.

2층 방에는 종이가 쌓여 있었다. 초고, 쓰다 만 문장, 지워진 문장들, 그리고 끝내 이어지지 못한 이야기들만 존재했다. 동현은 펜을 쥐었으나 한 줄도 쓰지 못했다.

아래층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더 이상 가게를 지킬 수 없었다. 의사는 쉬어야 한다고 했다. 형은 서울로 올라간 지 오래였고, 연락도 끊겼다. 남은 건 자신뿐이었다.

"한 달 안에 정리하든지, 네가 맡든지 해라."

아버지의 말은 부탁도 아니고 명령도 아니었다. 그저 현실이었다. 사실 동현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 답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거였다.

그날 밤, 동현은 원고를 모두 꺼내 바닥에 펼쳤다. 수백 장의 종이들이 바닥을 덮었다. 그 위를 걸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십 년 전, 첫 직장을 그만두고 썼던 글이었다. 그때의 문장은 지금보다 서툴렀지만 훨씬 생동감이 느껴졌다. 그는 무의식중에 알아버렸다. 지금의 자신은 더 이상 그때의 사람이 아니라는 걸.

"글 쓴다며."
아버지가 물었다. 동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지금 뭐가 됐냐."
질문은 차분했으나 날카로웠다. 말이 칼이 되어 깊이 박혔다. 동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한참을 기다리다가 말했다.

"이 가게는 네 할머니 때부터 지켜오던 거다."
묵을 써는 칼 소리가 들렸다. 묵을 써는 소리와 간격은 한결같이 일정했다.

"버릴 거면, 제대로 버려라. 어중간하게 하지 말고."

그날 밤, 동현은 원고를 다시 펼쳤다.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자신이 썼던 문장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어디에도 끝이 없었고 어디에도 완성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자신은 글을 쓰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글을 쓰고 있는 사람으로 남고 싶었던 것뿐이라는 걸.

어중간하게.
어중간하게..

동현은 그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그리고 날이 밝기 전, 미뤄뒀던 결정을 내렸다. 그는 원고를 하나로 모아 들고 아래층으로 향했다. 그 다음으로 묵을 쑤던 가스불 위에 종이를 올렸다. 버릴 거면 제대로 버리자고 생각했다. 종이는 천천히 타올랐고 문장들이 검게 말려 올라갔다. 묶여 있던 종이들이 한꺼번에 숨을 들이마시듯 타올랐다.

타닥, 타닥.

종이가 수축하는 소리가 그동안의 삶을 태워갔다. 자신을 지워내는 소리, 삶을 부정하는 열기가 손등을 스쳤다. 그 감각이 현실을 깨닫게 했다.

"동현아."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현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이 불장난을 멈출 수 있었으나, 멈추지 않을 예정이었다. 보란듯이 제대로 버리고 싶었다.

그때 창문이 열렸다. 찬 공기가 순식간에 밀려들었다. 불꽃이 기우뚱하더니 종이 한 장이 나무 도마 위로 떨어졌다.

열린 창문 틈으로 바람이 한 차례 더 들이닥쳤다. 완전히 타지 않은 문장들이 불을 품은 채로 여기저기 흩어졌다.
도마뿐 아니라 나무 주걱, 도토리가루가 담긴 비닐봉투, 심지어 도토리가 든 바구니 위에까지 불 붙은 문장들이 내려앉았다. 타닥거리던 소리는 짧고 날카로운 소리로 갈라졌고, 뜨거움은 밀려드는 화기로 변해가고 있았다.

"동현아!"
그제야 그는 일어났다. 급하게 물을 찾았다. 불 붙은 문장은 순식간에 수만 개로 늘어가고 있었다. 연기가 올라와 눈이 따끔거렸다. 젖은 행주를 휘둘렀으나 사그라드는 것보다 맞바람을 맞고 거세지는 불씨가 많았다.

아버지는 주방 한 가운데서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동현은 행주를 집어 던지고 아버지의 팔을 덥썩 잡았다. 불은 빠르게 번졌고 가게의 모든 것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불을 피해 밖으로 나왔다.
가게 전체가 불로 변한 듯 타오르고 있었다. 지붕이 먼저 내려앉고 그다음엔 기둥이 드러났다. 익숙했던 형태들이 순서를 잃은 채 무너졌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다급한 발소리. 물소리와 고함이 뒤엉킨 채 시간이 흘렀지만 불길은 그다지 줄어들지 않았다.

"내가… 내가 얼마나..."
아버지가 입을 열었으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한 번 삼킨 말이 다시 올라오지 못한 채 목에 걸려 있는 듯했다. 이내 미세하게 고개가 흔들렸다. 불빛이 얼굴을 붉게 비추고 있었다. 눈은 불을 보고 있었지만 시선은 가게 안쪽을 더듬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엔 그냥 맡은 거였어. 네 할머니가 넘겨주니까… 그냥 이어받은 거지. 그때는 잠깐만 하다가 정리할 줄 알았다."
아버지는 짧게 숨을 골랐다. 그러곤 말을 고르면서 오래된 기억을 더듬듯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고 싶은 건 따로 있었어. 다른 데 가서 일도 해보고 싶었고, 가게 말고 다른 걸로 먹고살 수 있을 줄 알았지. 근데 사람 일이 그렇게 안 되더라."

불길이 크게 일렁였다.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뒤늦게 따라왔다.

"하루 이틀 하다 보니까, 그 다음 날이 오고… 또 다음 날이 오고… 그러다 보니까 그냥 계속 여기였어."
말은 점점 낮아져 거의 혼잣말처럼 흘러내렸다.

"그래서 그냥… 지킨 거다."
아버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 서서, 타들어가는 가게를 오래 바라봤다. 침묵이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동현은 그제야 알았다. 아버지는 이 가게를 선택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선택하지 않았던 시간이 쌓여, 아버지의 새 삶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그 사실이 이해된 순간부터, 불길 속에서 무너지는 것은 묵 가게가 아니라 할머니와 아버지의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이 가까워지며 불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남은 것은 검게 그을린 자리뿐이었다. 사람들은 하나둘 물러났지만 아버지는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동현은 그 뒤에 서 있었지만 다가갈 수 없었다.
그는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말로는 닿을 수 없는 종류의 일이 있다는 것을, 동현은 그제야 이해하고 있었다.

신발 밑에서 바스락 소리가 났다. 검게 그을린 종이 조각엔 한 단어가 적혀 있었다.

'무심코'

불에 그을려 반쯤 사라진 글자였지만, 이상하게 또렷하게 읽혔다. 무심코, 무심코. 그는 그 말을 입안에서 굴려보았다.
무심코 맡았던 일, 무심코 넘겨진 시간, 무심코 이어진 하루들이 쌓여 누군가의 삶이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그러했듯 말이다.

동현은 발끝으로 종이 조각을 짓눌렀다. 바스락 소리가 짧게 부서졌다. 불은 이미 꺼졌고, 식은 잿더미는 굳어가고 있었다.
태운 것은 종이가 아니었다. 문장도 아니었다. 누군가의 시간이었고, 누군가가 선택하지 못한 채 견뎌온 삶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잿더미 속에는 끝내 굳지 못하고 겉만 타버린 묵과 주저앉은 아버지가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동현은 굳어버렸다. 묵 냄새는 더이상 나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그는 글을 쓰지 않게 되었다. 자신의 이야기가 누군가의 삶을 태워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은 계속 흘렀으나 동현은 그 자리를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

영원히 굳지 못하는 것과, 그것이 굳어가길 바라는 시간 사이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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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오
안녕하세요. 교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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