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알람 없이도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스트레칭도 하고, 씻고, 오랜만에 분칠도 하고 거울을 봤다. 간만에 사람다운 얼굴이 보였다. 초행에 길을 잃을까 싶어 후다닥 길을 나섰다. 처음 보는 낯선 길이었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날아다니는 새 소리도 감상하고, 식당과 카페도 구경하면서 걸어갔다. 멀리 초등학교가 보였다. 조그마한 아이들이 자기 몸만 한 가방을 메고 걸어가고 있었다. 비로소 나도 출근을 한다는 실감이 났다.
첫 출근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경력이 있으면 뭘 하나. 새로운 공간에서는 다 소용없었다. 앉아 있는 게 가시방석이었다. 전화벨 소리나 사람 발걸음 소리가 들리면 미어캣 마냥 고개를 주욱 들었다. 첫 회의시간, 자기소개를 하면서 고장 난 로봇마냥 뚝딱거렸다. 이후 자리에 돌아와 펼쳐본 업무 책자엔 처음 보는 단어가 가득했다. 늦은 오후 무렵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먼저 일을 하고 있던 동료들이 잘 챙겨준 덕분이었다.
우당탕탕 일주일을 보내면서 나는 아무도 없는 숙소에서 해방감을 느꼈다. 비록 아침, 저녁은 편의점 음식으로 해결했을지라도 마음 하나만은 편했다. 비로소 내가 독립의 첫 발을 뗐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그동안은 왜 이렇게 과감해지지 못했을까, 라는 후회가 밀려올 만큼 울산의 밤은 고요하고 아늑했다. 둘째로 살면서도 늘 나를 옥죄던 책임감도, 아빠의 무심한 눈빛도 울산에는 없었다. 나는 비로소 진짜 숨을 쉬기 시작했다.
휴식도 잠시, 다시 월요일이 오기 전에 내 한 몸 뉘일 방을 구해야했다. 울산에 있는 인맥이란 인맥은 끌어 모아 물어물어 부동산에 갔다. 세 곳을 돌아보고 가장 괜찮은 곳을 정했다. 드디어 십년 넘게 꿈에 그리기만 하던 내 방이 생겼다. 비록 통장에는 구멍이 났지만 가슴 깊은 곳은 가득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집 관련으로 이것저것 처리하다보니 빠르게 주말이 왔다. 나는 짐을 챙기기 위해 다시 대구로 올라갔다. 챙길게 얼마 없다고 생각했는데 챙기다보니 한 가득이었다. 엄마는 짐을 보며 연신 입을 뗐다.
“울산에선 뭐 먹고 댕깄노.”
“혼자 있고, 돈도 없고 방도 없는데 편의점 밖에 더 있나 뭐.”
“이거는 안 챙기나?”
“아, 알아서 챙길게 좀.”
엄마의 잔소리 아닌 잔소리에 점점 지쳐가던 내가 한 마디 쏘아붙였다. 엄마는 잠시 침묵하다 말을 이었다.
“뭐가 그리 급해서 이리 나가노. 아쉬워죽겠다.”
엄마가 툭 속마음을 꺼냈다. 옆에서 묵묵히 엄마 말을 듣고 있던 아빠가 대뜸 던지듯 말했다.
“그게 뭐가 아쉽노? 내는 하나도 안 아쉽다. 나이를 먹으면 나가야지.”
“어이고. 당신은 딸한테 하는 소리가 맞나?”
더 듣고 있기 어지러웠다. 나는 짐을 챙기다 말고 물을 마시는 척 하며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지만 마음 속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뭘 기대해.’
‘나는 무슨 대답이 듣고 싶었던 걸까..’
마음 속 물음이 커졌지만 답은 찾을 수 없었다. 평생 나를 섭섭하게 한 아빠의 차가운 태도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만 더 선명해졌다. 답답한 마음을 정리하려면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다시 짐을 챙겼다.
아침이 밝았다. 걱정이 많은 엄마는 아침부터 나를 들들 볶아댔다.
“야야. 잊지 말고 다 챙겨래이. 밥 해먹어야지? 쌀도 챙기주까?”
“조금만 줘. 무거워~”
“사려면 다 돈이다. 고마 다 가져가라.”
이렇게 저렇게 하다 보니 짐이 새끼 치듯 불어났다.
“고마 다 같이 나가자! 하나씩 들어라.”
아빠의 말이 신호탄이 되어 온 식구가 짐을 하나씩 들고 집을 나섰다. 미리 도착해 있던 남자친구와 함께 테트리스 하듯 짐을 실었다. 안 그래도 작은 차가 짐으로 가득 차 더 작아보였다. 엄마는 걱정 어린 눈빛을 하고 말했다.
“주말에 올거제? 이거, 얼마 안 되지만 아침이라도 챙기무.”
“안 줘도 되는데.. 잘 쓸게요.”
“가래이.”
마지막엔 아빠의 세 마디 짧은 인사를 끝으로 나는 남자친구와 울산으로 내려갔다.
그때만 해도 나는 내 인생에서 아빠라는 존재가 완전히 지워지는 완벽한 독립의 서막인 줄 알았다. 그때는 정말이지 몰랐다. 내 독립이 하나도 안 아쉽다고 하던 그 남자가,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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