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자식을 필리핀으로 보내기로 결정하셨다. 필리핀으로 보내기로 결정하셨다. 나중에 듣기로는, 첫째는 부모 모두 바쁘고 하나 뿐인 자식을 봐줄 수 없는 환경이었고. 둘째는 시대가 바뀌어도 영어는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하신 것. 셋째는 하나 뿐인 자식이 혼자 집에 들어와서 게임을 하는 것을 봐줄 수 없으셨다고 했다.
어머니는 나의 동의를 얻기 위해 내가 동물 중 가장 좋아하던 거북이를 이용했다. "필리핀에서는 모래사장에서 삽으로 모래를 파내면 바로 거북이 알이 나온대!" 어렸던 나는 거북이에 혹한 채 제대로 된 이해 없이 약관 서명을 해버렸다.
대구 동부 버스터미널에서 인청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로 한 날이 왔다. 5월 중순의 대구는 낮에는 선선한 봄날씨였고 밤에는 찬 바람이 불었다. 낮은 건물이었던 버스터미널 안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형광등에서 내리쬐는 푸른색 조명이 대기석 쪽만 켜져있고 나머지 건물내부는 깜깜했다. 잠이 덜 깼던 나는 어머니 품에 기대어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대화를 나누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필리핀에서 나를 맡아 주기로 하신 이모님께서 도착하셨고, 나는 인천공항으로 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른 아침에 출발한 버스는 정류장을 빠져 나오자마자 실내등을 껐다. 버스 바깥은 어두워서 무엇이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단지 그때에는 동대구역 쪽에 신세계 백화점이 없었기 때문에 어두운 그림자들만이 동대구역 쪽에서 아른거렸을 뿐이다.
인천공항에서 정신없이 수속을 하고나서 눈을 들어보니 니노이 아퀴노 국제공항이었다. 처음 내려서 게이트를 걸어갈 때 본 바깥 풍경 속에는 내가 머리 속에 그렸던 바닷가 모래사장은 없었다. 넓은 시멘트 바닥이 하염없이 펼쳐져 있었다. 당연하게도 기어다니는 거북이가 있을 턱이 없었다. 나를 비행기에 태우기 전 어머니는 매일 저녁 내게 알파벳과 기초 영어 단어를 가르쳐 주셨지만 주변 알파벳 조합의 소리는 읽을 수 있어도 의미는 읽을 수 없었다.
공항에서 나와서 집에 가는 길, 습하고 숨이 막히는 더운 공기가 모든 공간을 채우고 있었고 망고나무와 야자수가 빼곡하게 자라 있었다. 또 하나 극적으로 변한 건, 외동으로 자라온 내게 누나가 한 명 생겼다. 어머니 친구분의 외동 딸이었다. 나는 누나가 있는 동생의 삶을 생후 처음으로 알게 됐다. 누나가 별났던 것도 한 몫 했다.
우리 둘을 초등학교에 보내기 위해선, 영어 공부가 필수였다. 두 달여 동안 우리는 낮 동안 영어학원에서 영어를 배우고, 저녁에는 집에서 필리핀인 과외선생님과 함께 또 영어 공부를 했다. 밤이 되면 영단어와 동사변화를 외우고, 일기를 쓰고 누나에게 놀림 받다가 선풍기 바람에 의지해서 잠을 잤다.
7월이 되었을 때, 우리는 어느 정도 영어가 트였고 나는 필리핀인 아이들이 다니는 사립 초등학교에 3학년 그대로 입학했다. 나중에 듣게 된 입학경위는, 입학시험 과목 중 수학 점수가 높아서 다른 과목 점수가 낮아도 입학시켜 주었다고 한다. 누나는 내가 떨어졌던 국제학교에 붙어서 의기양양하게 나를 또 조롱했다.
집에서 학교에 가려면 차 타고 적어도 1시간이 걸렸다. 이모 댁은 일반 필리핀 사람들이 살기에 너무 비싼 동네였고, 학교는 필리핀 중산층이 거주하는 곳에 있었다. 차를 타고 10분만 이동해도 깔끔하고 높은 건물들의 모습이 서서히 낮고 어두운 색을 띄기 시작했다.
학교도 깔끔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울퉁불퉁하게 마감된 시멘트 벽에 하얀색 페인트가 발려있었고, 운동장 바닥은 거친 자갈들이 표면에 들어난 시멘트 바닥이었다. 운동장 중간에는 큰 열대나무 하나가 뻗쳐서 높은 단상 쪽에만 그늘을 드리웠다. 그럼에도 그 학교는 필리핀에서 좀 산다는 사람들의 자녀가 다니는 학교였다. 또 초등학교와 고등학교가 같이 있어서 마침 그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던 이모의 따님이 날 도와주기에도 편했다. 또 좋았던 점은 한 학년에 24명 남짓한 학생들 밖에 없었고, 그 중 서너 명의 한국인 아이들 빼고는 모두 필리핀 아이들이었다.
학교 방침상 따갈로그어 수업시간 말고는 모든 시간, 휴식시간에도 영어로 말해야 했다. 필리핀 친구들은 물론 가끔 따갈로그어로 대화하기도 했지만 거의 항상 영어로 대화했다. 그래서 국제학교에서는 드물지만, 내가 다닌 학교에서는 입으로 공기를 빨아들이며 나는 „씁“ 소리로 친구들끼리 서로를 불렀다.
또 과목마다 반을 이동하면서 수업을 들었어야 했는데, 우기에는 시원한 교실에서 다른 교실로 가는 그 시간 사이에 이미 땀으로 옷이 젖었다. 습하고 더워서 바지가 피부에 달라붙어서 불쾌한 느낌이 계속 들었다.
7교시까지 끝나고 나면 오후 4시 쯤이 됐다. 학교 정문에는 쇠창살 문이 있고, 그 앞을 권총을 지닌 경비원이 지키고 있었다. 이모가 우리를 태우러 오기 전까지 나는 경비원과 대화했다. 진짜 총이냐고도 물어보고, 농담도 주고 받았다. 저스틴이라고 불리던 경비원은 매우 착했고 아이들에게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하교시간이 되고 10분 쯤 흐르면 따~호하는 소리가 들린다. 따호는 순두부에 카라멜 시럽 그리고 작은 타피오카 펄을 섞어주는 간식인데 이모 차에 타고 있던 누나와 나는 자주 2 페소를 주고 차에서 먹은 뒤 영어학원으로 이동했다.
토요일 아침이 되면 우리는 그 일대에서 사는 한인 아이들과 12인승 밴을 타고 농구를 배우러 갔다. 지붕만 떠있는 농구코트에서 나와 누나는 2시간 동안 농구공을 드리블하며 뛰어다녔다. 숨막힐 듯한 더운 공기가 폐를 채우고, 온몸이 뜨거워질 때면 쉬는 시간을 가졌다. 그때 마셨던 살얼음이 낀 깔라만시 주스는 아직도 기억날 만큼 맛있었다. 등꼴이 저릴 정도의 신 맛이 혀를 강타하지만 따라오는 단맛은 정신이 아득해질듯한 더위마저 버틸 수 있게 해줬다.
토요일에 농구를 하고 수영수업까지 끝나고, 한가로운 시간이 되면 나는 집에서 창밖을 구경했다. 이모댁은 아파트 높은 층에 있었기 때문에 넓은 평원에 초록색 넓은 잎을 가진 열대나무와 야자수들이 곳곳에 솟아있는 도시풍경이 보였다. 나가고 싶었지만 혼자 나갈 수도 없었고, 집에서 창문 밖을 바라보거나 책을 읽거나 체스를 뒀다. 누나는 체스를 좋아하지 않아서 나는 혼자서 뇌를 반쪽씩 나눠 체스를 두었다.
초등학교에서 처음 배운 체스는 내 마음에 쏙 들었다. 몇 수를 뇌 속에서 굴린 뒤 말을 움직이고 상대 킹을 잡을 때의 쾌감이 엄청났다. 3학년 때 나는 학교에 공부하러 가는 이유보다 필리핀 친구들하고 체스를 두러 가는 게 더 컸다. 또 저녁에 집으로 오는 과외선생님과도 체스를 뒀는데, 치대를 다니던 과외 선생님은 진도가 일찍 끝나면 막간을 이용해서 내게 체스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어느 날, 이모 따님의 고등학교 친구가 같은 학교에 다니던 나까지도 생일파티에 초대해줬다. 큰 누나의 친구분은 필리핀군 고위간부 자녀였던 것 같다. 그때는 친구분의 아버지께서 군인이라고 들었을 뿐이었다.
모두가 정장과 드레스를 차려입고 거대한 홀에서 생일파티가 열렸다. 처음 입어본 정장의 느낌은 까끌까끌했고 거대한 건물 안에서 사람들이 북적이는 것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어색하게 지정석에 앉아있는 와중에, 사람들이 손을 들고 한 명씩 앞으로 나와서 중앙 의자에 앉아있는 누나의 친구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큰 누나는 내게 나가서 마이크에 "You are so beautiful today" 한 마디 말해보고 오라고 부추겼고, 나는 떠밀려서 떨리는 목소리로 주입된 문장을 내뱉었다.
거대한 홀에 그 많은 사람이 왜 그렇게 커다란 환호성을 질렀을까. 겁에 질려 굳은 표정으로 나는 자리에 돌아갔다. 마이크 뒤에는 카메라가 있었고, 조명은 여기저기서 빛을 내고 있었다. 영어도 미숙했고 내향적이었던 내게 그 자리는 쉽게 적응되지 않는 자리였다.
내가 4학년이 되던 해, 누나는 국제학교보다 내가 다니는 사립학교가 더 힘들다는 말에 발끈하여 내 학교로 전학 왔다. 그리고 무더운 여름이 찾아왔다. 국지적으로 쏟아지는 비가 자주 내리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건물들을 잇는 행랑을 지나가고 있으면 비가 떨어지면 얇은 슬레이트 판에서 팅팅팅팅 소리가 났다. 그 주기적으로 들리는 비 소리가 좋았다, 다른 친구들이 습한 공기를 피해 에어컨이 틀어진 교실에 들어가 있을 때, 나는 학교를 빙돌면서 쏟아지는 비를 구경하고, 소리를 감상했다.
몇 주 더 있으면 태풍이 찾아온다. 담임선생님은 이번 태풍이 시그널 3이니까 내일은 등교해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공지했다. 다음 날 통학 직전에 누나는 휴교라고 들었다고 이모에게 전달했고 나는 오늘 학교 가야한다고 말했다. 상반된 이야기에 혼란스러웠던 이모는 학교에 직접 전화해서 진위를 확인해야 했고, 학교까지 가는 차 안에서 누나는 잔소리를 들었다.
여전히 토요일에 수영과 농구수업을 주말에 들었고 일요일에는 차 타고 2시간 정도 걸리는 따가이따이에 바람을 쐬러 갔다. 나는 이 폐쇄된 공간에 잘 적응했지만, 누나는 나가고 싶어서 자주 불평을 했다. 한 번은 누나가 필리핀인 친구 생일파티에 초대받았다. 누나는 매우 가고 싶어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누나의 안전이 첫 번째 이유였지만, 이 시기부터는 운전수 없이 이모께서 직접 운전하고 다니셨기 때문에 토요일에 1시간 이상 운전하시는게 싫으셨을 것이다. 입이 쭉 나온채 불만 가득했던 누나는 이 시기에 이모에게 자주 혼이 났다.
4학년이 되고 8월 정도였을까, 어머니는 슬슬 이제 돌아오고 싶지 않냐고 자주 전화로 말을 하셨다. 학교 생활도 재밌고, 성적도 잘 나오기 시작하는데 돌아오라는 말을 듣자 아쉬운 마음이 더 컸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더 공부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솔직히 이 시기는 내게 엄청 즐거웠던 시기는 아니었다. 같은 학교 한국인 학생들과 불화가 있었고, 나는 모든 한국인 학생들과 연을 끊고 필리핀 친구들하고만 이야기하고 놀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이 즈음 이모에게 자주 혼이 났다.
학교에서 현장학습으로 마닐라 베이를 갔다. 마닐라 베이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파시그 강을 처음으로 봤는데, 이 근처에 필리핀 대통령궁이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강변을 따라 쓰레기가 둥둥 떠다녔고, 강물은 회색과 갈색빛이 돌며 혼탁했다. 버스 안에서 우리를 인솔하던 선생님은 강변에 보이는 건물들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 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고 강물이 그들의 화장실이자, 식수이자, 삶의 공간이라고 말해주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지나쳐온 파시그 강과는 매우 달랐다. 마닐라 베이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방파제 주위로 잘 정돈된 거리 그리고 SM Mall of Asia라는 거대한 쇼핑센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우리는 역사 시간에 배웠던 마닐라만 전투를 상기했고, 친구들과 농담하고 버스 안에서 웃으면서 다시 혼탁한 파시그 강을 건너 학교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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