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제일 낭만적일까
누가 제일 낭만적일까
2025.12.01
턱·⌛13분

1
그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문창과를 알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알려고 하지 않았으니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운이 좋다면 책을 읽는 성인으로 진입했겠으나 지금까지 책을 습관처럼 읽는 인간으로 살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어쩌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겠지만, 방 한쪽에 키만 한 책탑을 몇 개 쌓을 수 있을 정도로 책을 구매하지는 않는 삶. 골머리 앓을 일도 많이 줄어들었으리라. 지금 당장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드러내는 문학에 매혹을 느끼고 이 세계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고, 내가 어떤 세계를 보여줄 수 있을지 따위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울린이나 할리 같이 질 좋은 스웨터를 입고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이라며 몇십만 원 하는 코트를 여러 벌 옷장에 넣어두고 겨울을 나면서 세계의 진실 같은 건 모르겠고 예금과 주식을 공부하면서 집 한 채 마련하기 위해 아등바등 애를 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삶은 그럴듯해 보인다.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만 아니면 어찌저찌 해결할 수 있을 법도 하다. 더 많은 문제를 감지하더라도 굳이 그것들을 내가 고민할 필요가 없으며 그건 누군가 알아서 할 문제라고 내버려둘 문제들도 지금보다 많았을 것이다. 그 삶에서 낭만은 사치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는 삶은 그 삶이 아니네. 낭만은 사치가 아니라 내가 쥘 무기가 되었네.

2
낭만 주위를 맴돌기. 빠져들지도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애매한 상태로 멈추지 않기. 주변 사람들의 성공에 배 아파하지 않기. 아프면 약 먹기. 현실적으로 생각하는 연인을 비꼬지 않기. 타코 먹기. 다들 얼싸안고 이 시간이 영원할 것처럼 즐겁게 놀다가도 때가 되면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야 함을 잊지 않기. 밤거리를 걷기. 밝은 곳을 두려워하지 않기. 속으로 다른 사람을 욕하고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나를 욕하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지 않기. 부모님을 만날 때면 잘 웃고,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능숙하게 말하기.

3
J는 나와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다. 당시 학교에는 글쓰기 관련 동아리가 없었고, 나는 글 좀 쓴다고 알고 있던 J에게 말을 붙이고 동아리를 만들어 보고 싶었으나 지금보다 낯을 더 가렸는지 말을 걸지 못했다. 담임 선생님의 소개로 교무실에서 처음 J와 만났다. 둘이 글 쓰는 걸 좋아하니까 서로 인사를 하라는 말을 듣고 뻘쭘하게 인사를 했다. 교무실을 같이 나오면서도 별다른 말을 나누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는데 어쨌거나 J와 친해졌다. J의 주변 친구들과도 친해졌다. 동아리를 만들 수 있는 인원이 모였고, 내가 장을 맡아 동아리가 만들어졌다. 동아리의 이름은 일기일회로 지었다.

당시 나는 저 말에 꽂혀 있는 상태였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참 신기하게 느껴졌다. 십 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저 말을 좋아한다. 원래 뜻과는 다르게 살짝 변형하긴 했다. 한 번 만난 사람은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된다. 생애에 단 한 번 뿐인 일일 정도로 소중한 만남이 한 번뿐이면 얼마나 아쉽나. 그래서 난 어떤 만남이든 한 번 만난 사람은 최소 한 번은 더 다시 만난다는 나의 태도를 여기저기 말하고 다니기도 했다.

고등학교 내내 동아리는 잘 유지가 되었다. 졸업하고 난 뒤에도 나름대로 유지가 되었다고는 했는데, 지금은 모르겠다. 알려고 하지는 않으니 들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다른 동아리원들은 글쓰기와 관련이 없는 학과를 가겠다고 말했는데, J는 나와 같이 문창과를 가겠다고 했다. 대신 J는 나와 달리 서울에 있는 대학교 문창과를 노렸다. 나도 지원할지 말지 고민은 했지만, 집을 떠나서 서울까지 가는 일에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안락하고 편안하게 있고 싶었다. 어차피 언젠가 고생할 건데 더 빠르게 고생할 필요는 없다고도 여겼다. 독립 욕구보다 독립으로 인해 벌어질 일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J는 실기까지 봤지만, 붙지 못했다. 나는 지역인재전형으로 등록금을 면제받았다. 기분은 좋았다. 좋기만 한 기분은 오래가지는 않았다. 기회를 놓쳤나? 하는 의문보다는 오래가지 않는 좋은 기분을 붙잡으려 친구들과 진 술을 마셨다. J와 나는 같은 대학교의 문예창작학과로 들어가게 되었다.

4
대가리 아프네.
안 써지나.
어.
담배나 한 대 피우고 오자.
니 안 피자나.
간접흡연 ㄱㄱ
ㅋㅋ 미친 새끼

5
J2는 대학교에서 만났다. 시를 썼다. 시를 보고 난 이렇게는 못 쓸 것이고, 이렇게 못 쓴다는 게 굉장히 안타까웠다. 내가. 자기 내면에 있는 온갖 부분들을 끝까지 밀어붙인 다음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생생한 표현으로 가득 찬, 이 말도 안 되는 시 혹은 글을 내가 쓰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몇 번은 얼이 나가기도 했다. 그가 교내에서 열린 대회에서 시로 상을 받았을 때가 절정이었다. 티는 안 냈지만, 온갖 열패감과 우울감이 담긴 글을 블로그에 적었다. 내가 알고 있는 나라면 지워야 했는데 내가 모르는 나는 J2가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글을 올린 지 하루 정도 지났을 때 J2가 댓글을 달았다. 우리 사이는 더 돈독해졌다.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J2와 나는 다른 인간이라는 것이 실감 났다. J2는 삶보다 글이 중요하다고 했고, 나는 글보다 삶이 중요했다. J2를 처음 만난 뒤로 많은 시간이 흐르며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이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등장한 총이 당연히 사용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J와 J2 그리고 나는 함께 어울렸다. J와 J2는 장이 잘 맞아 보였다. 밤새 글 쓴다고 하는 일이 잦았다. 그렇게 과제 마감에 찌든, 그러나 묘하게 흥분한 모습의 두 사람을 보고 있다가 난 막차 타고 집에 가겠다고 말했다. 그럴 줄 알았다면서, 어떻게 한 번을 같이 밤을 안 새나면서 핀잔을 주는 J와 J2. 능청스럽게 다음에는 꼭 같이 밤을 새우자는 말을 남기고 지하철역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다가 뛴 적도 많았다. 끝까지 남아 맺고 싶은 부분을 시간 때문에 끝내 맺지는 못하고, 그 자리에서 도망치듯 뛰쳐나와서 막차를 타기 위해 뛰어가는 내 모습을 멀리서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으면 민망할 때가 많았다. 넌 글에 이 정도도 걸지 않으면서 도대체 무슨 글을 쓰겠다는 거냐. 이래 등단은 하겠냐. 내가 나에게 묻고, 걍 난 자고 싶을 뿐이라고 대답을 던져줬다.

플랫폼에 도착해서 지하철 타면 금방 잠들었다. 내려야 할 역을 지나쳐서 내리면 버스는 당연히 끊겨 있었다. 내려야 할 역에 내렸어도 버스는 끊겨 있었고, 난 좀 더 걸었다.

6
J는 많은 일을 겪고 어떤 글을 쓰지 않는다.
J2는 시를 쓰지 않고 소설을 쓴다.

나는 소설도 시도 다 쓰고 산문도 쓰고 쓸 수 있는 건 다 쓰려고 한다.

누가 제일 낭만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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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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