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이런 데서 어떻게 자? 나는 못 자.'
딱 이 표정이다. 얼씨구, 숙소 예약할 때는 괜찮아 보인다고 가성비 좋다고 해놓고선 이제 와서 못 들어오시겠단다. 입구에서 신발도 안 벗고 돌하르방처럼 서 있다. 찌그러진 미간도 굳어 간다. 아예 돌하르방이 돼서 제주 유물로 남으면 어쩌지. 걱정이네.
지금부터 딱 8시간 동안만 이 숙소에 머무를 수 있다. 내일 새벽 비행기로 돌아가야 하니까. 그런데 현재 우리는, 일분일초가 아까운 이 시점에 대치 상태에 놓여 있다. '이리 들어와'와 '여긴 못 들어가'의 창과 방패의 싸움이 이어진다. 못 들어가겠다는 말만 반복하던 네가 전략을 바꾼다.
"나는 괜찮은데... 네가...
진짜 나는 괜찮은데 현이가 이런 데 싫어하잖아..."
어라, 망부석이 말을 하네. 짐 가방까지 들고 현관에 서 있는 주제에. 빼꼼 방을 들여다본 후부터 지금까지 들어오기 싫어서 버티고 있는 주제에. 여행 내내 "내가 원했던 건 이게 아니야..."라면서 로맨틱이란 단어를 입에 달고 지낸 게 누군데. 이젠 내 탓을 한다 이거지? 오케이, 해보자는 건가? 이번엔 내가 먼저 시작한다.
"나는 괜찮아."
"나도 괜찮아."
"나는 진짜 괜찮아."
"나도 진짜 괜찮아."
속사포 랩배틀처럼 '진짜'와 '괜찮아'의 핑퐁이 난무한다. 관성에 떠밀려 '나는 진짜 진짜 괜찮...'을 내뱉으려다가 관둔다.
그래, 꽤 실망한 것도 사실은 사실이다. 부티크 호텔이라더니 실제로는 여관에 더 가까웠으니까. 그래도 어쩌겠는가. 우리가 싸운다고 뾰로롱 하고 방이 바뀌지는 않을 테고. 오래 머무를 것도 아니니, 일단은 어르고 달래는 수밖에.
그렇게 겨우 방에 발을 들이긴 했는데, 또 망부석이 됐다. 어딘가에 몰카가 있을 것만 같아서 옷도 갈아입기 싫단다.
'그래도 내가 여자고 네가 남잔데, 뭔가 좀 바뀐 것 같지 않냐?'
하아-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 주변을 본다. 보자, 보자. 한번 둘러나 보자. 우리 집에 이십 년 전부터 있던 나무 옷걸이랑 똑같은 게 벽에 걸려 있다. 젓가락처럼 나란히 누워 있는 나무 끝을 좌우로 쭈욱 잡아당기면 마름모 모양 세 개가 나타나는 그 옷걸이. 수십 년째 이 집 저 집에서 쓰이는 걸 보니, 이 마법의 옷걸이는 절대 고장이 나지 않는 모양이다.
그나마 꽃무늬 벽지로 꾸며진 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테이블 옆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90년대 부잣집 마당에 놓여 있을 법한 의자. 유려한 곡선으로 만들어진 철재 등받이, 그리고... 꽃무늬. 비닐 장판 재질로 만들어진 엉덩이 부분에 꽃이 만발했다. 그럼, 그렇지. 꽃무늬가 없으면 여관이 아니지.
정체 모를 브랜드에서 나온 헤어스프레이, 누가 썼을지 모를 나무 롤 빗, 할머니 집 앉은뱅이 화장대에 하나씩 놓여 있을 만한 빨간색 도끼빗. 나도 모르게 흰 장갑을 낀 귀족처럼 검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스윽 훑는다.
음, ...어, 어? 먼지가 하나도 없는데? 롤 빗도 손잡이가 낡았을 뿐 새것처럼 깨끗하다. 바닥에도 먼지 한 톨이 없다. 나도 모르게 대단한 발견을 한 것처럼 소리쳤다.
"여기 생각보다 엄청 깨끗해!"
"......"
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이젠 대답조차 없다. 겉보기가 그래서 그렇지 깨끗하기만 하구만 뭐. 자기 집이 더 지저분하면서 밖에 나오니 공주도 이런 공주가 따로 없다.
방 한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있는 이 망부석 공주님(?)을 어떻게 옮겨야 하나 잠깐 고민하다가, 일단 손부터 씻기로 한다. 그나마 물은 잘 나오겠지.
세면대에서 손을 박박 씻으면서 거울을 보니 코팅된 종이가 정중하게 붙어 있다.
'건물이 낡아 죄송합니다. 오래된 건물이라 방음이 잘 되지 않습니다. 깨끗하게 관리하려고 애쓰고 있으나 실내에서 흡연을 하시면 다른 객실과 복도로 담배 냄새가 새어 나갑니다. 모두의 편의를 위해 금연을 부탁드립니다. 편안히 쉬시다 가시기를 바랍니다.'
완벽한 인사말과 깔끔한 주의사항. 거울 속 얼굴이 살짝 빨개진다. 그러고 보니 오래된 건물치고 공기가 꽤나 상쾌하다. 천장에는 교체한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환풍기가 시원스레 돌아가고 있고, 세면대 옆에는 하얀 수건이 곱게 개어져 있다.
이제서야 이 여관, 아니 이 호텔의 이용객들이 남긴 후기가 떠오른다. "이것저것 요청했는데 잘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곳이 있었네요. 편히 쉬다가 갑니다", "다음번에 또 방문할게요". 그런 후기를 보며 망설임 없이 예약 버튼을 눌렀던 일도 기억났다.
나는 얼른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 놓고 티끌 없이 새하얀 침대 시트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조형물처럼 멀뚱히 있는 너를 부른다. 가방이 테이블에 놓여 있는 걸 보니 다행히도 동그란 테이블 크기만큼은 마음이 열렸나 보다.
"공주님아, 이리 와서 좀 앉아 봐."
너는 아슬아슬하게 침대에 걸쳐 앉는다. 나는 네 궁둥이가 침대에 닿는 그 순간을 확인하자마자 냉큼 와인 한 병을 꺼냈다. 숙박비의 두 배나 되는, 마지막 날을 위해 남겨둔 소중한 와인이었다.
운이 좋았다. 와인이 있어서 운이 좋았다는 게 아니고. 와인 마개가 코르크가 아니라 스크루 캡이어서 좋았다. 크게 힘들이지 않고 까드득 하고 와인병이 쉽게 열렸다.
얼음 바스켓을 요청하고 고급 치즈를 곁들여 마시려던 와인을 대뜸 까버리는 내 모습에, 로맨틱을 좋아하는 공주님의 미간이 한층 더 구겨진다. 소주병 까듯 열어 버린 와인을 병째로 한 모금 마시고 이번엔 네게 건넨다. 자, 얼른 마셔 봐.
"맛있지? 그치?"
"...어. 응, 진짜 맛있네."
다행이다. 쉽게 열린 와인병처럼 분위기도 스르륵 하고 풀린다. 와인을 몇 모금 마시더니 네가 갑자기 파핫- 하고 웃는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우리 모습이 꼭 바이킹 같단다. 거하게 성공한 해적질을 기념하며 비싼 와인을 병째로 먹는 기분이란다. 푸핫. 같이 웃음이 터져 버렸다. 그렇게 한 두 모금 나눠 마시던 와인은 금세 사라졌고. 사실 우리에겐 와인이 두 병이나 더 있었으니... 암, 성공한 해적단에게 한 병은 부족하고 말고.
다음 날 새벽, 밤새 얼마나 마셨는지를 가늠해 보기도 전에 우리는 눈곱부터 떼야 했다. 한시도 못 있을 것 같던 공간에서 기절하듯 잠들어 결국 늦잠까지 잔 거다.
엄청난 숙취를 머리에 달고 뛰어가 겨우 시간을 맞춰 좌석에 앉은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씨익 웃었다. 합의한 건 아니지만 나는 우리의 입꼬리를 잡아당긴 그 무언가를 낭만이라고 부르기로 정했다. 아마 너도 이 합의되지 않은 이야기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해적단은 한 패니까.
분명, 그렇지? 나의 망부석 공주님아.
아마 그만큼 맛있는 와인은 앞으로 쉽게 만날 수 없을 거야. 또 만나게 된다면야 그건 그거대로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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