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개들의 시대, 아무개들의 낭만〉
“만옥, 다음 주말에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어요." 만옥은 훈의 입가에 묻은 와인을 부드럽게 닦아낸다.
"어디?"
"무조건 가겠다고 해요. 그러면 알려줄터이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 것을 안다. 하지만 욕심부리고 싶다. 능글맞은 농담에, 장난이 가득 담긴 눈에, 온기를 담은 손에 머무르고 싶다.
어차피 3일 뒤면 끝이다. 만주 차가운 벌판에서 가련하고 비통하게 스러진 조선아무개들의 울음이 아직 귀에 생생하다. 만옥을 뒤엎은 어머니의 뜨뜻한 피. 숨이 끊어진 가족들의 몸 밑에서 숨죽여 있었던 시간. 제 손으로 그 악랄한 것들의 숨통을 끊을 순간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그 순간이 3일 뒤로 다가왔다. 눈물이 마를 새 없는 세상에 태어난 만옥에게 허락된 마지막 사치는 하루살이의 날갯짓처럼 의미없게 느껴졌다.
"난 약속을 함부로 하지 않아. 손가락 걸고 하는 약속은 나한테 아무의미 없어" 만옥은 싱긋 웃으며 훈의 품속에서 벗어난다.
"에헤이, 근사한 곳으로 내가 모시리다. 번잡하고 소란스러운 경성이 싫다 했잖소. 낭만있는 곳으로! 이 잘생긴 정 훈과 같이 가요"
"낭만이라..."
훈의 말은 늘 그렇듯 가볍고 따뜻했다. 낭만이라는 단어는 남은 생이 겨우 3일인 만옥에게 사치처럼 느껴진다. 만옥이 비친 훈의 눈동자는 우주의 중력을 닮아 만옥을 끌어당겼다. 하지만 만옥은 끌려가지 않았다. 어차피 우주의 먼지로 돌아갈 몸. 그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마음 속 폭풍이 되었다.
만옥은 훈을 집으로 돌려보낸 뒤, 경성살롱으로 향했다. 또각또각 소리를 내는 구두, 붉은 립스틱, 활짝 핀 꽃처럼 풍성하게 만옥을 감싸는 흰 블라우스. 만옥은 무도회장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무용수로 보이기 위해 신경써서 옷을 입었다. 경쾌하면서도 우아한 발걸음, 차분하고 상냥한 말투, 선을 넘지 않는 적당한 농담으로 연회장 인기 무용수가 되어 자주 일본 고위관리와 접했다. 만주에서 넘어올 때만 해도 '여자스러운 것'들은 일절 몸에 걸치지 않았다. 하지만 적을 잡기 위해서는 적과 가까이 있어야했다. 자신의 가족을, 봄날을, 삶을 앗아간 그들을 처단할 날이 목전으로 다가왔다.
경성 이 주모는 벌써 모든 준비를 마쳤다. 서양식 건물에서 살롱을 운영하며 막대한 부를 쌓은 이 주모에 대해 알려진 것은 없다. 다만, 이 나라에 빚진 것이 있다며 그 부를 모두 독립운동가를 지원하는데 쓰고 있었다. 쓴 술을 고독과 함께 마시는 그녀는 오늘도 만옥을 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만옥.”
“네.”
“두렵나?”
“조금… 아니, 많이.” 잠시 침묵하다 입술을 깨물었다.
“그럴 거다. 두려움 없이 이런 일에 뛰어드는 게 더 이상하지.”
“그래도 해야죠.”
“그래. 너밖에 못 해. 나는 그럴 용기가 없었지. ”
주모의 과거는 장막 뒤에 있었다. 아무도 모른다. 늘 빚진 게 있다고만 말할 뿐, 속내를 털어놓은 적은 없었다. 따뜻하고 시원한 건물, 풍요로운 식탁, 번쩍이는 옷과 장신구들. 하지만 그 아무것도 주모의 처연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주모는 만옥을 보며 조용히 기도하듯 말했다.
“다음 생에는… 이런 일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살아라.”
“주모는?”
“난 없어도 된다. 너만 청춘을 다 누리며 살아봤으면 좋겠다. ”
그녀의 말은 따뜻했다. 하지만 그 온기는 오히려 서로를 아프게 했다. 가 닿을 수 없는 봄의 들녘처럼 아득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3일 뒤, 마지막 밤, 마지막 사치. 훈과 만옥은 식탁에 마주 앉아 있다.
“만옥, 왜 그런 얼굴이야. 내가 또 뭐 실수했어?” 볼이 발그레한 훈이 만옥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넘긴다.
"내일 공연이 있으니까 긴장되나봐. 고위층 관료들도 많이 온다고 하고"
"걱정마 나도 가있을거야."
"온다고? 못 온다고 하지 않았어?"
만옥은 수없이 고민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 훈을 보고 싶을까, 아닐까.
본다면, 자신의 생이 한 없이 애틋할 것이고 보지 않는다면 서러울 것 같았다. 남겨진 훈에게 마지막 모습은 지금처럼 평범한 여자이고 싶기도 했다.
“훈. 우리가 다른 세상에서 다시 만난다면, 그땐—”
“그땐 뭐?”
“그땐 우리 낭만을 느끼며 살 수 있을까?”
“당연하지. 그런 세상이라면… 만옥 당신은, 분명히 더 빛나고 있을거요. 이번 공연 끝나면 같이 멀리 떠납시다”
" ....나도 그러고 싶어. 노래 잘 하고 올게 " 그에게 건넬 수 있는 마지막 약속이었다.
마지막 밤은 성냥불처럼 삽시간에 태워졌다. 뜬 눈으로 맞이한 새벽. 만옥의 볼에 닿은 햇빛은 따사로웠다. 공기는 청량했다. 도착한 연회장에서는 모든 것들이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정시에 맞춰 관악대의 소란스러운 연주와 행진하는 군인들의 발소리가 벽을 울렸다. 만옥은 지금 슬플까, 기쁠까.
무대에 오르자 관객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가장 가까운 자리엔 목표물이 앉아 있었다. 무대 뒤편, 어둠 속에 훈의 얼굴이 보였다.
한 사람은 식민의 광대로, 한 사람은 순수한 애정으로 만옥을 바라본다.
그 시선들이 만옥의 눈동자에 뜨겁게, 그리고 서늘하게 번졌다.
“만옥 언니, 오늘 따라 더 빛나네.” 합창단의 소녀가 속삭였다.
“그래야 하니까.”
노래가 절정으로 오를 때, 인파 사이를 헤치는 군인 하나가 보였다.
그는 목표물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고, 목표물은 놀란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Plan B다.
수상한 움직임을 눈치 채고 목표물이 자리를 뜰려고 하는 순간, 그 즉시 처단할 것
가슴 안쪽에서 사그락거리는 종이 소리. 품 속의 냉기가 온 몸으로 퍼졌다. 만옥을 집어삼키는 독이었다.
상기된 표정으로 공연장에 들어온 주모가 보였다. 붉은 모자. plan B. 만옥의 죽음을 알리는 메시지.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만옥은 목표물을 향해 몸을 던졌다. 억겹처럼 느껴지는 삶의 마지막 5초. 그녀의 시선은 무대 뒤편에 서 있는 훈에게로 향했다. 한 겨울 압록강 물길처럼 매서웠던, 생명력을 빼앗긴 낙엽처럼 메말랐던 만옥의 생 마지막에는 사랑이 있었고 간절한 미래가 있었다. 만옥의 눈에 담긴 훈의 마지막 모습으로 그녀의 영혼 어딘가에 봄이 시작되었다. 몸은 갈갈이 찢길지라도 눈에 담고 싶은 마지막 얼굴. 살짝 미소 띈 훈의 시선과 단상 아래로 몸을 던지는 만옥의 시선이 이내 맞닿았다. 그리곤 마지막 숨을 그에게 건넸다.
“ 살고 싶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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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서울이 된 경성의 한 공연장. 만옥을 닮은 여자와 훈을 닮은 남자가 카펫 위에 올라 노래한다. 별빛이 반짝이는 하늘을 날며 지키고 싶은 그리고 지킬 수 있는 약속을 노래한다.
별을 넘어 눈부신 세상이 보여
어느새 모든 게 선명해져
난 너와 함께 별빛 너머로
만옥이 마지막 순간에 품고 간 봄은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을 뚫고 올라왔다. 침탈과 전쟁, 독재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잊지 않고 찾아왔다. 남녀의 말간 사랑으로, 흥얼거리는 노래로, 퇴근길 카메라 속에 담긴 불그스름한 노을로, 그 모든 우리가 누리는 낭만의 모습으로. 그 시대 아무개들의 바스러진 삶은 시간이 잉태하여 낭만으로 태어났다. 우리는 그 낭만을 지켜야하고 사랑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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