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여러 개로 나누는 방법에 대하여
하늘을 여러 개로 나누는 방법에 대하여
2025.12.01
부엽토·⌛23분

이 나이 먹고 부끄럽지만, 종종 하늘을 나는 상상을 하곤 합니다. 둥실둥실 파아란 창공을 유영하다가 어느새 묵빛 고공까지 솟아올라 별의 바다에 빠지는 거죠. 다 큰 어른이 하기엔 좀 유치한 상상이죠? 고백하자면 가끔 비행하는 꿈까지 꾸는 편이랍니다. 물론 실제로는 점프를 해본들 제 초라한 다릿심으론 1초 남짓 허공에 머무를 뿐이죠. (1초 만에 철푸덕 착륙하고는 이것도 초단기 비행이라고 우길 수야 있겠습니다만)

저는 기구까지 이용할 생각은 없지만, 낭만을 쫓아 저 푸르른 하늘로 실제 비행을 감행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1986년 12월 14일, 지나 예거와 딕 루턴은 프로펠러 비행기 보이저호를 조종하며 여정을 떠납니다. 9일 뒤, 이들은 세계 일주에 성공하며 인류 역사상 최장기간 무착륙 비행에 성공합니다. 200시간 넘게 프로펠러 비행기로 하늘에 머무른다니 보통 강심장이 아니죠?

그런데 무착륙 비행이라는 종목에서 자연의 힘은 더 놀랍습니다. 알바트로스 중 떠돌이 개체는 5년씩 하늘 위에서 살아가다가 가끔 지상으로 내려오기도 한다네요. 과연 창공의 왕자라 할만합니다. 아무리 새라지만 이렇게 오래 날 수 있는 생명체는 달리 찾기 힘들죠.

하지만 알바트로스보다 더 오래 나는 새가 있습니다. 바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아브락사스를 향해 나는 새’죠. (아마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독일 소설 아닐까요) 성장 혹은 자기완성에 대한 비유로는 가장 유명한 비유라고 할 수 있겠군요.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아기 새에게 알은 그야말로 자신이 알던 세계의 전부겠죠. 그리고 그 알을 깨고 날아오르는 새의 모습은 어쩐지 자유로워 보입니다. 새롭게 태어나고픈 인간의 갈망을 이렇게 잘 표현한 문장도 드뭅니다. 그런데 데미안에 나오는 새는 환상의 생물 아니냐고요? 맞습니다. 하지만 가상의 새라고 해도 주목할 만한 일이 있습니다. 사실 ‘아브락사스를 향해 나는 새’는 한국의 하늘을 60여 년간 날고 있다는 점이죠. 지금도 우리 머리 위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무슨 소리냐고요?

한 번 들어보세요. <데미안>은 1960년대에 처음 번역된 이후로 큰 사랑을 받은 책입니다. 인쇄판이 상하는 사건이 벌어질 정도로 잘 팔렸다고 하죠. 반세기 전, 번역 초기에는 다양한 연령대와 계층이 탐독하는 책이었고, 어느 시점부터 ‘청소년 성장 소설’로 여겨져서 젊은 층에 주로 읽힙니다. 유행이 지나갈 만도 하련만, <데미안>은 2025년도에도 여전히 교보문고 문학 판매량 최상위권에 군림 중입니다.

그러니까 1960년대에서 2020년대까지, 알을 깨고 신에게 날아가는 새가 독자들의 마음속에서 60년 동안 비행하고 있는 셈입니다. 엄청난 초장기 비행술이죠. 사실 청년의 고뇌를 그린 문학은 수두룩합니다. <호밀밭의 파수꾼>도 있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도 있죠. 하지만 유독 한국에서는 <데미안>이 무수한 경쟁자를 물리치고 장기 집권 중이네요. 이건 생각해 볼만한 일이죠. 왜 한국의 청년들에게 알을 깨고 날아오르는 새의 모습이 그토록 가슴을 울렸던 걸까요?

먼저 저 자신을 되짚어 볼까요. 저는 왜 하늘을 나는 상상을 해버리곤 내심 부끄러워할까요? (여러분에게 질문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긴 합니다만) 그건 아마 벗어나고 싶기 때문일 겁니다. 끊임없는 일감, 꼰대 같은 상사, 답답한 신입, 툭 하면 싸우는 가족, 가냘픈 지갑, 다가오는 명절 등등. 나를 옥죄는 여러 가지 현실에서 탈주하고 중력이 없는 듯 날아오르고 싶은 거죠. 그건 어쩌면 자기혐오와 좀 닮은 면이 있습니다. 현실의 못난 나를, 힘든 내 상황을, 그런 나를 만든 온갖 것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가슴 깊숙한 곳에 있거든요.

자기혐오는 비행과는 반대 방향입니다. 굴을 파고 내려가는 것과 흡사하죠. 사실 제가 굴 파는 거 하나는 전문가입니다. 세상이 던지는 과제에 자꾸 도망치고 싶고, 답 없는 자신에게 염증이 나서 스스로 혐오하고, 자기를 혐오하는 자기에게 지쳐 다시 자신을 혐오하고. 그렇게 끝없이 굴을 파고 내려가면 어느새 자기만의 동굴 안에 갇히고 맙니다. 그런데 동굴 안은 어쩐지 안락해서, 계속 동굴 속 혈거인으로 안주하게 만드는 힘이 있죠.

그렇게 방에 갇혀 게임을 꽤 오래 했습니다. 굴 안에도 나름 자유가 있답니다. 평행 우주를 지키는 용사가 되기도 하고, 중세 유럽의 영주가 되기도 하고, 아포칼립스의 좀비 헌터가 되기도 했죠. 게임 안에서는 뭐든지 할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말하면 뭐하지만 게임은 꽤 잘했습니다. 나는 지하 세계의 왕이다! 그렇게 하데스가 된 듯 외치면서 애써 열등감을 감추기도 했죠. 하지만 지하 세계의 하데스가 저 푸르른 창공을 질투하듯, 저 또한 그래서 하늘을 동경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반면 날아오르는 건 좀 더 낭만적인 관점이죠. 지금 내 상황을 정면 돌파하고픈 욕망, 더 멋지고 대단한 내가 되고 싶다는 조금 순수한 욕망. 그런 욕망을 진심으로 이루어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것과 비슷하달까요. 요즘 한국 청년들처럼 치열하게 사는 세대도 드물다고 생각하는데요. (그에 따른 반대급부로 온갖 부작용이 일어나는 중이긴 합니다만) 그게 아마 우리 사회에서 <데미안>이 인기 있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이해하기엔 나와 너무 다른 삶을 살아온 부모님 세대, 나는 엉금엉금 기어가는 것만 애가 타는데 너무 빨리 급변하는 사회, 치열한 경쟁에서 제 자리 찾기도 어려운데 밀려나면 먹고사니즘도 챙기기 어려운 풍토. 그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당당히 하늘로 날아오르고 싶은 청년의 마음을 <데미안>이 대변해주는 거죠.

물론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날갯짓하다 꼴사납게 추락하면 저처럼 굴을 파고 들어가 버리기 일쑤죠. 제 이야기입니다만, 부모님과 갈등도 많이 겪었습니다. 좀 노력하다가 안 되니 방 안에서 게임이나 하는 모습이 아마 답답하셨겠죠. 아버지와의 사이는 최악이었습니다. '산업화 시대에 자수성가한 사업가 스타일의 가부장적인 경상도 남자'를 상상하면 얼추 맞아떨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을힘을 다해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다!" 그렇게 정신론을 주장하셨지만 저는 요지부동이었죠. 쌍팔년도 옛날 논리를 들이대 봐야 어쩌라는 거냐는 식으로 대응했으니까요. 그렇게 아버지 탓을 하며 저는 땅굴을 100M쯤 더 깊이 파고 말았습니다.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아기 새가 알껍질 속에서 알을 깨고 나오려면, 어미 새도 바깥에서 같이 알을 쪼아준다는 뜻이죠. 하물며 새도 서로 알을 깨는 걸 도와주는데 말이에요. 상상하면 참 귀엽고 애틋한 광경이죠? 하지만 현실은 고사성어와 다르죠. 알껍질을 쪼아 도와주는 부모새가 있지만, 많은 청년이 부모가 쪼아대는 말에 상처를 입고 굴속으로 숨어버립니다. 예전엔 화가 많이 났었죠. 아버지는 책도 많이 읽은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왜 그 풍부한 지식과 유창한 언변으로 사람을 괴롭히는 걸까. 혹시 부친께서는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것처럼 미운 새끼를 쪼아서 죽여버리는 그런 새일까. 그렇다면 얼른 도망쳐야겠다! 그래서 독립을 했습니다. 만족스럽게도 자취방은 완벽한 알껍질 그 자체였죠.

그렇게 저는 반쯤 히키코모리가 된 채로 알처럼 안락한 굴에서 왜 오래 지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부모님과 덜 싸우게 된 거죠. 그도 그런 게,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덜 마주치는데 더 싸울 도리가 없죠. 그리고 좀 더 멀리서 차분하게 부모님을 관찰하니 느껴지는 바가 있었습니다. 갑자기 효도심에 불타올라 유교 파이터로 대오각성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건 오히려 미술관의 회화를 감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무슨 말이냐, 서로 거리가 생기니 부모님의 얼굴에서 주름살이 눈에 더 잘 띄었다는 거죠. 그걸 뒤집어 생각하면, 부모님 또한 청년일 때가 있었다는 것을 문득 생각하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흙수저였죠. 진흙 구덩이에 처박힌 채 빈곤함의 설움을 알던 소년이었고, 종전 이후 누구보다 하늘 높이 날고 싶었던 청년이었고, 산업화 시기 실제로 힘차게 날아올랐던 중년 사업가였습니다. 주변의 누구보다 크게 성공했던 분이죠. 그리고 아버지는 추락했습니다. 태양 가까이 날아오른 이카루스처럼, 드높이 날아오른 만큼 더 깊은 심연으로 떨어졌던 거죠. 아버지가 추락한 자리에는 회한, 좌절, 분노, 불안, 우울 등이 무수히 흩날린 깃털과 말라붙은 핏자국 같은 흔적으로 남았습니다. IMF 이후 다시금 성공하고 싶으셨겠지만 잘 되지 않으셨겠죠. 자신이 힘들었던 만큼, 아이들은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이 가슴 속에 자리 잡아 자식들을 쪼아대었던 거겠죠. 아이러니한 일이긴 한데요, 저는 부모와 몸이 멀어진 만큼 부모 마음을 좀 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부모님에게 받았던 상처를 잊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거 쉽지 않죠. 다만 잊히지 않아도 이해하려 노력은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미워하기 위해 사는 삶은 정말 힘이 드니까요.

누구든 영원히 비행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때로는 추락을 겪기도 하죠. 그러니 지나 예거와 딕 루턴의 최장기 비행 기록 이야기에서 정말 중요한 건 얼마나 오래 날았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장의 길이 혼자라 느껴진다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 비행한 ‘인간’들은 동료와 함께 비행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그건 마냥 낭만적인 과정은 아니었을 겁니다. 우리 가족이 그랬듯 서로 쪼아대는 일도 있었을 테고, 어쩌면 불편하게 느껴지는 사람과 피곤한 시간을 견뎌내는 힘도 필요했겠죠. 꼭 부모 자식 관계가 아니더라도 그렇습니다. 아, 그렇다고 뚜쟁이 노릇을 하려는 건 아닙니다. 성장을 위해 꼭 연애나 결혼 등을 할 필요는 없죠. 다만 인간은 타인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성장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가족은 가장 가까운 타인인 셈이죠.

제 경험상 가장 가까운 타인과 가끔 멀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내 생각을 차분히 정리할 기회가 되거든요. 그런 면에서 글쓰기는 인간식 비행술 예비 연습인 셈입니다. 서로 각자의 글을 통해 타인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다시금 자신의 세계를 관찰하게 만드니까요. 그렇게 키보드 위에서 1초간 두드린 한 글자가 쌓여 우리를 성장케 하리라 믿습니다. 나아가 글이 우리 삶의 미해결 과제를 직면하게 할 힘을 가지길 소망해 볼 수도 있겠죠. 제가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것처럼요. 이렇게 쌓아 올린 글자가 우리를 더 먼 곳으로 안내해 줄 테니까요.

저는 이제 날아오를 생각입니다. 정들었던 땅굴 두더지 생활을 청산하고 부모님과 화해할 생각이거든요. 그렇다면 저는 부모님이 바라보던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준비가 된 걸까요? 아버지 당신께서 그랬던 것처럼 사회적 성공이라는 하늘로? 전쟁터에서 태어난 나라의 20세기 청년들이 만들어낸, 21세기 청년들마저 전쟁 같은 삶을 감내하며 바라보는 그 하늘을 향해?

아닙니다. 다만 부모님이 하시는 일부터 다시 살펴볼 생각입니다. 왜냐구요? 아마 그 자리가 부모님의 착륙지일 테니까요. 그분들도 청년 시절 자유롭게 날아올랐던 시기가 있었을 테고,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불시착했던 삶의 지점이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저는 바로 그 자리를 유심히 살펴보며 이륙 준비를 하고 싶습니다. 다만 사회적 성공이 아닌, 상처와의 결별이라는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생각입니다. 예, 모두 똑같은 좌표를 향해 날 필요는 없겠죠. 타인의 욕망을 내 낭만으로 삼을 필요도 없고요. 저는 그런 식으로 창공을 나누어볼 셈입니다. 제 마음대로 하늘을 나눠도 하늘이 이해해 줄까요? 그래도 괜찮을 거에요. 하늘은 무한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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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엽토
안녕하세요. 부엽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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