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필코 복수(?)하리라.”
이 소리는 웨딩 촬영 중 생각지도 못한 답프로포즈를 받은 한 남성(=나)의 혼잣말이었다. (‘답’이 붙은 건 내가 먼저 프로포즈했으니까.) 지금부터 들킬까 봐 조마조마하며 홀로 고군분투했던 복수극, 그 치밀했던 81일간의 비하인드를 들여다보자.
[D-81] 축가 선정 및 듀엣 섭외
축가는 하고 싶었지만 노래 실력이 애매했고, 랩을 하고 싶은데 마땅한 곡이 없었다. 이대로 평범한 결혼식을 맞이해야 하나 생각하던 차, 드디어 좋은 영감님(=good idea)이 방문하셨다.
‘지오디의 촛불 하나를 하거라.’
랩도 있고, 하객들도 다 아는 노래에, 가사도 의미 있는 데다 특히 와이프의 최애 가수(그중 최애는 손호영)라는 점까지 완벽했다. 하지만 혼자 하기엔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가장 친한 친구를 섭외했다. 축가 경험 많고 노래 잘 부르고 심지어 랩까지 잘하는 적임자를.
“언제든지 도와드리죠”라며 흔쾌히 승낙까지 받았다. 와이프한테는 친구가 축가를 준비한다고 밑밥을 깔았다. 문득 ‘이렇게 잘 풀려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 혼자만 신난 첩보전이 시작되었다.
[D-73] 청첩장 문구 작성
내친김에 대범하지만 복선도 깔고 싶었다. 노래가 시작되고 나서야 눈치챌 수 있게.
와이프한테는 “청첩장에 시구, 대사, 가사 같은 걸 많이 넣는대” 하면서, 추석 연휴 KBS의 ㅇㅁㄷ 지오디를 보고 떠올랐다며 촛불 하나 가사를 넣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후렴을 오마주하여 청첩장의 첫 문장을 함께 완성했다. 와이프는 자기가 받는 프로포즈에 알게 모르게 관여하고 있었다. 하객들에게도 복선을 주려고 두 번째 문장에는 ‘앞길을 밝히는 촛불’을 넣었다. 축가 중간 플래시 유도 문구로 제격이라 생각했는데,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다더라.
[D-56] 반지 케이스 제작
축가와 청첩장으로 끝내긴 싫었다. 눈에는 눈, 프로포즈에는 프로포즈라고, 하나가 더 필요했다. 다행히 한 번 더 좋은 영감님이 찾아오셨다. 그리곤 말씀하셨다.
‘촛불처럼 생긴 반지 케이스를 구해라. 그래서 축가 마지막에 대왕암 프로포즈를 재연하거라.’
처음에는 시중에 비슷한 케이스가 있는지 찾아봤다. 당연히 없었다. 플랜 B로 지식인, 긱몬, 크몽, 숨고를 다 뒤지면서 제작 가능한지 질문도 하고 검색도 해봤지만 역시 없었다. 그렇게 포기해야 하나 싶던 찰나, 은인을 만났다. 구상한 것보다 더 나은 작품을 단 2주 만에 만들어주셨다. 이번에도 뭔가 잘 풀리는 느낌이었다. 나만 잘하면 됐다.
[D-23] 축가 녹음
이제 나머지는 준비 완료! 노래만 남았다. 연습만이 살길이라 생각했……던 것도 잠시, 새로운 자극이 입력되면 계획을 수정해서 행동에 옮기는 ENFP 특성이 또 발동했다. 다른 예식 보러 갔다가 덤으로 아이디어까지 얻었던 것이다.
신랑신부가 직접 부른 축가에서 음향이 뭔가 다르다는 걸 캐치했다. 확인해보니 AR을 깔고 그 위에 노래를 불렀단다. 유레카! 이거다. ‘높은 음만 도움 좀 받자’ 하고 바로 친구를 꼬드겨서 녹음 일정을 잡았다.
그리고 와이프한테는 회식이 잡혔다고 둘러댔다. 놀랍게도 진짜 회식이 갑자기 생겼다. 다행히 의무 참석은 아니었다. ‘또 잘 풀리네?’라는 생각으로 마음 편히 스튜디오로 향했다. 녹음은 1시간 만에 뚝딱! 보정도 하루 만에 뚝딱! 이제는 진짜 잘 따라 부르기만 하면 됐다.
[D-37~6] 어벤져스 구성
와이프가 답프로포즈 때 친구, 플래너, 사진작가, 헬퍼를 포섭하여 모두가 한통속(?)으로 날 속인 것처럼, 나에게도 이벤트를 함께할 내부자들이 필요했다. 우선 그들에게 계획을 공유하기 위해 식순과 가사 파일을 만들었다. 와이프가 완성한 식순에 메모를 넣어 선택 인쇄할 수 있게 했고, 가사 역시 각 소절마다 메모를 넣어 각자의 역할을 안내했다.
[D-37] 사회자 : 미팅 후 개인 톡으로 작전을 공유하여 포섭에 성공했다.
[D-16] 웨딩플래너 : 와이프가 혹시 몰래 또 다른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지는 않은지 동태를 살피기 위해서 포섭했다.
[D-15] 웨딩홀 진행팀 : 식권 수령 겸 예식 안내 미팅을 하던 중, 와이프가 잠깐 통화한다고 고개를 돌린 그 찰나의 사이에 대범하게도 폰 메모장에 ‘축가 이벤트 합니다’라고 얼른 써서 담당자에게 보여주며 몰래 포섭했다. 곧바로 메일 주소를 받아내 축가 음원을 보내면서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했다.
[D-6] 스냅, 영상작가 : 이 긴박하고 예쁜 장면이 완벽하게 기록되길 원해서 따로 포섭했다. 와이프한테 연락처가 있었는데 달라고 하면 눈치챌까 봐, 따로 구글링해서 비밀리에 연락한 건 안 비밀.
[D-4] 음원 업로드
4일 전까지 웨딩홀에 음원을 보내야 했다. 그동안은 친구가 무슨 곡을 할지 숨겼다고 연기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진짜 축가 음원까지 내가 따로 보냈다고 하면 안 믿을 것 같았다. 와이프에게 보여줄 확실한 연막이 필요했다.
원래는 친구가 최근에 다른 곳에서 축가로 부른 ‘사막에서 꽃을 피우듯’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처남이 이 곡을 부른다네? 급하게 데이브레이크의 ‘꽃길만 걷게 해줄게’로 곡을 바꾸고 MR을 구해서 업로드했다. 이제 남은 건 리허설과 본 무대뿐이었다.
[D-3] 리허설
원래는 조명 연출을 하고 싶었다. ‘너무 어두워’에 맞춰 꺼지고, ‘세 개가 되고, 네 개가 되고’에 맞춰 켜지고, ‘촛불 반지 케이스’에 스포트라이트까지. 마이크도 와이프 모르게 전달받고 싶었다.
그래서 가능한지 보려고 사전 리허설을 하러 갔다. 불가능했다. 이유를 들으니 납득이 됐다. 포기했다. 그래, 결혼식장을 내 개인 콘서트장으로 생각하면 안 되는 거였다.
[D-1h] 식전
마지막까지 수정된 것이 많았다. 플래시 유도 멘트도, 마이크 전달도 친구가 하기로 바뀌었다.
가장 마지막까지 풀리지 않았던 난관은 의외로 쉽게 해결됐다. 원래 식순에 예물 교환이 있어 반지 케이스를 와이프가 가지고 있다가 식전에 진행팀에 전달하면, 진행팀은 친구에게 반지를 주고 친구는 그걸 촛불 케이스에 넣어서 준비하기로 했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기 쉽지 않아서 도저히 답이 없었다.
그런데 프로포즈 당사자가 의도치 않은 도움을 주네?
“여보가 가지고 있다가 진행팀 주면 돼.”
이번에도 의도치 않은 완벽한 어시스트를 해주었다.
[Main Event]
친구가 대놓고 마이크를 들고 오는 순간 생각했다.
“들켰다. 근데 어쩔 수 없다, 주사위는 던져졌으니.”
그리고 마침내 반주가 시작되었다. 예식장 스피커에서는 와이프를 완벽하게 속였던 연막용 곡이 아닌, 진짜 축가의 전주가 웅장하게 터져 나왔다. 순간 어리둥절해하는 와이프의 표정을 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물론 실전은 완벽한 작전대로만 흘러가지 않았다. 시작하자마자 마이크 음향이 제때 나오지 않는 대형 사고가 터졌고(중간에 기지를 발휘해 마이크를 슥 바꿔주신 사회자님, 감사합니다.), 긴장한 탓에 목소리는 사정없이 찢어지며 역대급 삑사리가 났다.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했던 칼군무는 온데간데없고 애매한 뚝딱이 춤만 춰댔다. 게다가 동선이 완전히 꼬여서 하객들을 등진 채 나 혼자 와이프만 바라보며 노래하고 프로포즈를 하는 웃픈 광경이 연출됐다.
치밀했던 계획에 비하면 그야말로 우당탕탕 순식간에 끝난 엉성한 무대였다. 하지만 아쉬움 가득한 눈물겨운 재롱잔치였을지라도, 와이프는 마지막 순간까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세상에서 가장 환하게 웃으며 좋아해 주었다.
그거면 됐다. 완벽한 복수극, 대성공이었다.
[Thanks to : 작전 공모자 명단]
이 무모하고 치밀했던 비밀 작전의 숨은 조력자분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가장 먼저 추석 연휴 KBS ㅇㅁㄷ 지오디와 연말 콘서트를 열어주신 지오디 멤버분들, 덕분에 유튜브 알고리즘을 지오디와 촛불 하나가 지배해도 들키지 않았습니다. 완벽한 알리바이를 제공해 주셨어요.
(여담이지만, 결혼식 2주 뒤에 같이 콘서트 보러 갔었는데 촛불 하나 나올 때 저 오열했어요. 지난 81일간의 눈물겨운 프로포즈 준비 과정이 필름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감정이 확 북받쳤거든요.)
그리고 반지 케이스를 제작해주신 굿도기님, 음원을 만들어주신 볼트스튜디오, 현장에서 기지 발휘해 작전 심폐소생해주신 이병석 사회자님, 와이프를 같이 속여주신 금플래너님, 연출을 매끄럽게 해주신 퀸벨웨딩 진행팀, 이벤트 장면을 잘 담아주신 연스튜디오와 스토리어댑터까지 모두모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작전을 무사히 실행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무모한 도전을 흔쾌히 함께해 준 소중한 친구에게도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2년이 지난 뒤 그 친구의 결혼식에서 다시 한번 같이 노래 부르며 제 나름의 보답을 했었는데, 서로의 인생 가장 특별한 무대를 듀엣으로 주고받은 우리의 우정도, 두 부부의 사랑도 영원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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