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르트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마인강 산책로에서.
21살, 일본으로 여행을 떠났다. 내 돈으로, 혼자 하는 첫 해외 여행이었다. 블로그와 카페를 뒤져 오사카와 교토에서 로컬만 간다는 식당과 카페, 오래된 서점, 작은 신사까지 모두 저장하다 보니, 일본 땅에 발을 딛기 전부터 구글맵은 핀으로 빽빽했다. 여행 계획을 적은 메모장도 추천 메뉴, 교통편, 예상 경비 같은 계획으로 스크롤을 한참 내려야 할 정도로 길어졌다.
출발 전부터 무리했던 탓일까. 여행지에서 나는 심한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일본 애니메이션 등장인물처럼 온천에 몸을 담그고, 자판기에서 병으로 된 커피 우유를 뽑아 마시려던 내 계획은 산산조각 났다. 낮에 겨우 관광지 한두 곳을 돌아보고, 숙소에 들어오면 쓰러지듯 잠들었다. 가장 기대했던, 추위에 벌벌 떨며 1시간 동안 줄을 서서 먹은 유명한 식당의 음식은 차갑고 맛이 없었다. 게다가 여행에서 돌아와 필름을 현상소에 맡겼는데, 사장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거 아무것도 안 찍혀 있는데요? 필름이 헛돈 것 같아요.”
비장의 카드였던 필름 카메라마저 나를 배신하고 만 것이다. 잔뜩 기대했던 일본 여행은 어쩐지 자꾸 틀어졌고, 허탈함은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다음 해 여름, 유럽으로 두 번째 해외여행을 떠났다. 방학 동안 유럽에 간다는 친구의 말에, 아르바이트로 모아둔 돈을 탈탈 털어 한 달 뒤 떠나는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이번에는 일부러 느슨하게 일정을 잡았다. 바르셀로나, 파리, 베를린,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한 나라, 한 도시에서 일주일씩. 꼭 가고 싶은 관광지 한 곳과 식당 한 곳만 정해 두고, 무작정 거리를 돌아다녔다.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콜드플레이의 노래를 들으며 공원 벤치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했다. 비키니를 입은 사람들이 잔디밭에 얇은 돗자리를 깔고, 햇빛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길모퉁이 보이는 작은 카페에 들어가 평소 마시지 않던 에스프레소를 주문해 보기도 했다. 강렬한 쓴맛에 화들짝 놀랐다가 바리스타와 눈이 마주쳐 멋쩍게 웃어 보이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눴다. 썸머 바캉스로 문을 닫은 파리의 퐁피두 센터 앞에서는, 아쉬워하기보다 ‘다음에 또 유럽에 올 핑계가 생겼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여행의 종착지, 프랑크푸르트에서 나는 또다시 앓아누웠다. 기차가 연착된 탓에 6시간 만에 도착한 숙소에서, 28인치 캐리어와 배낭을 벗어 던졌는데도 몸이 너무 무거웠다. 도저히 방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도 마지막을 기념하기 위해 돈을 더 내고 1인실을 예약한 덕분에 여유롭게 샤워를 하고, 다른 사람의 코 고는 소리나 뒤척이는 소리 없이 푹 잠들 수 있었다. 느지막이 일어난 다음 날 아침, 밀려드는 허기에 연 냉장고와 찬장에는 각종 먹을거리가 가지런히 채워져 있었다. 그릇을 꺼내 우유와 시리얼을 부었다. 진한 우유에 달지 않아 맛있는 시리얼을 씹으며, 뜬금없이 오래된 예능 프로그램을 틀었다. 화면 속 농담에 피식 웃다가, 머나먼 이국에서 아침부터 꾀죄죄한 몰골로 혼자 이러고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창가에 걸터앉으니, 마인강이 내려다보였다. 햇살에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보다가,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에서 산 에코백에 오렌지 주스 한 병을 챙겨 방을 나섰다.
여름의 기운을 받아 잎을 넓게 펼친 플라타너스 숲길을 지나 마인강이 보였다. 여행 내내 붙잡고 있던 구글맵도, 이어폰도 없이 그냥 마인강을 따라 걸었다. 강가에선 제각각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로프로 만들어진 삼각형 모양 구조물 사이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부모로 보이는 이들이 벤치에 앉아 미소 짓고 있었다. 색색의 헬멧을 쓰고 자전거를 탄 사람들과 바닥까지 닿을 듯 긴 털을 가진 강아지와 산책하는 남자가 그 앞으로 지나갔다. 잔디밭에는 붉은 눈과 깃털을 가진 거위가 뒤뚱뒤뚱 걷고 있었다.
"눌, 아인스, 쯔바이, 드라이..."
힘찬 목소리가 바람에 섞였다. 고개를 돌리니, 유니폼을 맞춰 입은 사람들이 조정 연습을 하고 있었고, 그들 뒤로 요트 한 대가 여유롭게 지나갔다. 요트를 탄 사람과 손 인사를 했다. 강 건너편에는 한 무리의 여자들이 유로댄스 리듬에 맞춰 에어로빅을 하고 있었다. 강 사이를 잇는 쭉 뻗은 다리 위로 큰 새 한 마리가 날아갔다. 발코니가 있는 크고 작은 건물들 사이로 새를 따라가다 보니, 꼭 가고 싶었던 슈타델 미술관이 보였다. 아무렴, 미술관엔 가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삼켰다. 기분 좋은 단맛이 햇빛과 함께 목을 타고 내려갔다.
바쁘고 멋지게 살아내는 쿨한 사회인이 되는 게 버거울 때면, 나는 낯선 도시에서의 어느 평범한 아침을 떠올린다. 잠시 쉬어가는 행복을 느낄 수 있던 그 순간을 말이다. 낭만이란 거창한 게 아니라, 매일을 살아가며 곱씹어보고 싶은 장면을 찾는 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작은 노트에 문장을 눌러 담는 일. 마음에 든 물건을 오래도록 곁에 두고 사용하는 것. 아침부터 밤까지 친구와 공상을 나누는 시간. 서른여섯 장의 장면을 카메라 속에 모아놓고 현상을 기다리는 마음. 영화관에서 나와 OST를 들으며 여운을 즐기는 순간. 추운 날, 발길 닿는 대로 들어간 식당에서의 뜨끈한 부대찌개 같은 것. 이런 조각들이 모여 나를 살아가게 한다는 생각을 한다.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오늘이지만, 그런 날들이 계속되는 것이 나를 안도하게 만든다.
곧 겨울이 오고, 또 봄이 올 것이다. 언젠가 만날 어떤 문장, 어떤 장면, 어떤 빛이 다시 나를 움직이게 하겠지. 그 생각만으로도 나는 오늘을 조금 더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도시의 작은 창문 속에서 이름 모를 사람들의 낭만이 매일 이어지기를. 마주치는 모든 순간을 천천히 사랑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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