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꽃은 피어있다
그럼에도, 꽃은 피어있다
2025.12.01
비보·⌛13분

“꽃이 그렇게 좋아?“
”응, 예쁘잖아. 예쁘다, 너무 고마워.“

딱 작년 이맘때쯤이었다.

꽃 두 다발 사서 흥얼흥얼. 일하고 있는 학원까지 딱 10분 거리에 꽃집이 두 개나 있었다. 더 가까운 곳은 지나치게 화려한 꽃들만 진열돼 있어서 마음이 가질 않았다. 그래서 조금 더 멀리, 병원 바로 밑에 작게 꽃집을 하시는 사장님께 늘 찾아갔다. 한 다발은 왠지 부족하고, 세 다발은 지나치게 많았다. 결국 늘 두 다발이었다.

전에 그이는 가끔 꽃을 사줬다.
나는 그게 그렇게 좋았다.
살금살금. 그이는 겅중겅중. 아파트 계단을 오르던 어느 날, 문득 물어왔다.

꽃이 뭐가 좋냐고.
함께 침묵하기엔 4층까지는 너무나도 먼 계단이었다.
그때 나는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냥 좋다고만 했다.
무엇보다 그 마음이 너무 예뻐서.
나는 그게 낭만이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너는 아니었을지도 모르지.

계절이 바뀌고 꽃이 떨어질 때쯤 꽃병은 비었다. 바스락 바스락. 또 시들었네. 그래서 나는 매주 예쁜 꽃으로 꽃병을 채운다. 하얀 꽃병이 텅 빈 게 너무 보기 싫어서, 오죽하면 가짜를 사볼까도 생각했다.

딸랑-
이번 주는 장미였다. 퇴근하자마자 신문지로 말아 들고 왔던 꽃다발을 풀었다. 가시가 아직 남아있어 생채기가 났다. 따끔. 그럼에도 상처를 뒤로 하고, 다시 꽃병을 채웠다. 그저 마음이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아직까지 내 방 벽면에는 장미가 마른 채로 매달려있다.
그래, 그땐 그게 내 낭만이였다.

따끔.
.

…따끔.

그렇게 우리이길 포기했던 너를 나는 아직 잊지 못한다.

글쎄. 생각해 보면 나는 네 낭만이 부러웠다. 너는 작은 순간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고, 사소한 풍경에도 이유를 찾아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곁에 있고 싶었고, 같은 계절을 함께 나고 싶었다. 네가 가진 낭만이 나에겐 하나의 꿈이었으니까. 너는 일상의 먼지까지도 반짝이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너의 시선이 부러웠다. 너의 낭만은 그런 가벼운 게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태도였다. 멀리멀리 나아가는 그 시선이. 나는 그걸 너의 곁에서 닮고 싶었다. 그런 나보다 네가 여유로운 줄 알았는데 정작 많이 힘들어했다는걸, 시간을 갖자고 할때서야 알았던 내가. 너의 낭만을 품어주지 못했다는걸.

기억은 할까.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날, 이삿짐 박스에 박스를 가득 담았던 날. 나는 뭉그적대고 있었다. 정리를 깔끔하게 잘하던 너는 그걸 같이 버리러 가자고 했었다. 네 것도 아니던 그걸, 도와준다고. 추워 죽겠는데. 네 온기가 좋아서 같이 따라나섰다. 그런 날 위해 네가 세상에 마법을 부린 것 같았다. 그날 첫눈이 내렸다. 세상이 새하얗고 뽀얗게 보였었다. 세상에 우리 둘밖에 없는 것 같다고. 그렇게 꺄르르 웃으면서. 그때의 나는 몰랐다. 그 작고 사소한 하루가 나를 이렇게 오래 붙잡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지. 내겐 그게 평생 기억할 낭만 있는 하루였다.

나는 이제 어떤 낭만으로 살아가야 하나.

어린왕자가 장미를 위해 바오밥나무들을 관리해준 것처럼.
떠나자마자 장미가 무너졌던 것처럼.

낭만은 결국 우리가 붙잡고 싶은 세계의 마지막 모서리 같은 것일까. 손을 떼버리면 세계도 같이 무너지는. 사람과 사람이 만든 세계는 늘 불완전하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서 반짝거리는 순간들이 낭만을 이룬다고 믿고 싶었다.

우리의 세계는 어떤 세계였을까.
어떤 행성이였을까.
.
.
.
슈우웅.
착륙점이 사라진 비행.

정말 웃기게도 네가 없어진 뒤의 나는 너를 모방하고 따라하기 시작했다.
혼자 밥을 먹는 것조차 무서워하던 내가, 덜컥 비행기 티켓을 샀거든. 너는 떠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무언가 시작하는 것에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나도 그러고 싶었다. 사실 오기도 있었다. 나도 할 수 있다고. 그래서 너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일본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아직도 나는 너와 함께했던 시간을 버리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감추고 살아가고 있다는 걸, 마치 선언하듯이.

혼자 떠난 여행은 전날까지도 계획을 짜지 못해서 동선 따위 대충이었고,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것도 있었고, 제멋대로에, 우당탕탕거리기만 했다. 그래도 그 덕분에 천천히 혼자 생각할 시간은 충분했다. 너가 여기 있었다면, 내 엉망진창인 계획을 웃으며 이끌어줬을까? 너가 여기에 있었다면, 이 끝없는 풍경을 그리고 싶다고 말했을 수도 있겠다. 너가 여기에 있었다면…너가 여기에 있었다면… …그리고 그 생각의 끝에 꽤나 제대로 깨달음 하나를 얻었다. 나는 현실에 발을 딛고 서 있더라도, 마음은 늘 앞서 있다는 것. 그래서 다가오는 실망도 가장 먼저 닿았겠지. 그런데도 나는, 마음이 앞서가는 그 걸음을 포기할 수 없다.

낭만이란건 어쩌면, 이미 끝난 것을 끝났다고 말하지 못하는 마음의 모양이였을지도 모른다.
미련마저 낭만이라 치부하고 있다. 계속 함께 했다면 웃으면서 말할 낭만이었을 텐데, 갈라섰으니 이 이야기는 울면서 낭만이라 치부할테다. 이제는 놓아줘도 괜찮을까. 부끄럽게도 다 끌어안고, 다 내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서. 그렇다하면 사랑과 낭만 둘 다 잃어버릴 것만도 같았다. 그것이 비록 잊어도 되는 낭만일지라도.

글쎄, 어쩌면 나는 애써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지. 아마도 이 모든 흔들림이 한때의 사랑을 잊지 못한 증거일지도. 이토록 오래 곱씹고 있는 마음을 낭만이라 불러야 할지조차 몰랐으니까.


글쎄, 내가 가진 것도 낭만이라 생각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제는 낭만의 빈자리를 내 것으로 채운 나는 여전히 낭만을 믿는다.
아무 목적 없이 마음속에 피어나는 비효율을 감수하면서도 마음이 끌리는 걸 택하는 태도를 취한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숨듯 도망치면서도.

사랑과 설렘.
자유와 태도.
.
.
.
꼬르륵.

침몰.

낭만이 배고픔에 가라앉고 말았다.
나는 오늘 또 다시 가라앉기를 바랄 뿐이다.

꼬르르륵.

결국 낭만은 누군가가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네가 떠났어도 꽃은 여전히 피어있고,
계절의 온도는 내 마음과 상관없이 바뀌고 있으니까.
나는 그 흐름 속에서 다시 나의 온도를 찾아야 했다.

아마 나는 앞으로도 자주 무너질 것이다. 어젯밤에도 무너졌고, 오늘 아침에도 무너졌다.
그래도 괜찮다. 두꺼운 아스팔트 벽돌 속에서도 피는 꽃이 있는데.
언젠가 또 어떤 계절에, 어떤 날에, 나는 이유도 없이 마음이 데워지는 순간을 만나겠지.
현실에서, 추억에서, 어디서든. 누군가와 함께이든, 너와 함께이든, 혼자이든.
그때의 나도 오늘의 나처럼 조용히, 천천히라도 낭만을 믿고 있었으면 한다.

계절이 바뀌고 꽃이 떨어질 때쯤 꽃병은 다시 채워졌다.
꽃은 이제 다시 피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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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보
안녕하세요. 비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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