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덜트 스윔
어덜트 스윔
2025.12.01
데아·⌛14분

의자에서 나의 금묘(金猫)가 살쾡이 눈을 하고 있다. 이게 다 망할 낭만 때문이다.
우선 그대에게 알린다. 이 페이지에서만큼은 그대들이 부르는 '낭만이란 배를' 못 탈 수도 있겠다.
나 하나쯤은 분위기를 망쳐도 괜찮겠지, 뭐.

낭만이란 자고로 모두가 현명한 하나의 답을 할 때, '아니, 나만은 이 길을 가' 보겠다는 것이다. 누가 볼 땐 '쟤는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알겠대?' 해도 모두가 택하지 않는 그 길로 가버리는 것이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이 어떻게 돌아왔는지 뻔히 알면서도 노인과 같은 선택을 하는, 그런 인간이 되는 것이다. 온몸이 지치고 손이 문드러지고 피에 젖어도, 돌아오는 길 낚싯줄에 걸린 건 살점이 다 뜯긴 뼈대만 남은 물고기인 걸 알면서도 바다로 나서는 것이다. 그래, 낭만을 하는 인간은 노인이 되는 것이다.

낭만은 씁쓸하고 퀴퀴한 냄새가 난다.
조교로 일을 할 때 연구실에 연락하면 꼭 '5분 뒤에 올라오거라' 하시던 교수님이 계셨다. 동양 철학 교수님이셨는데 그래서 인지 눈썹이 희끗한 호랑이 같은 느낌의…. 아, 그러고 보니 고대 출신이셨구나. 아무튼 그 교수님의 연구실은 문고리를 잡기만 해도 독한 담배 향이 났었다. 분명 올라올 나를 배려해 환기했음에도 그저 담배 냄새가 아닌 묘한 독한 향이 났다. 비슷한 담배 냄새를 다른 곳에서는 맡아 본 적이 없다. 이미지로 떠올리자면 민화 속 호랑이가 담뱃대로 태워내는 나무 냄새랄까.

그래서 낭만을 그대에게 얘기하고자 한다면 우선 나는 작은 독방, 연구실을 상상해 보겠다. 독한 담배를 입에 대강 물고.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셔츠에 깃을 세우고 한 쪽 팔은 의자 뒤로 넘기며. 그대에게 '낭만…. 로망, 그래…. 그랬지….'라고 말 문을 틀 것이다.

이건 비록 몇 년 전 이야기이다. 당시, 나의 로망은 빨간색으로 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어두운 남색의 양장본으로 논문을 만들었다. 어느 한가한 날 과방의 논문들을 구경하다 유일하게 딱 하나 있는 붉은 색의 양장본을 본 적이 있었다. 그게 그렇게 특별해 보였다. 그래서 나도 언젠가 내 논문을 양장본으로 찍게 된다면 붉은색으로 하리라, 그게 내 로망의 표지였다. 그래, 그때의 나는 그랬었다.

문득 오래되어 사라진 줄 알았던 그때의 낭만. 몇 달 전 동성로 빈 임대 건물에 오래된 책을 모아 파는 할아버지가 계셨다. 궁금해서 들어가 보니 구석 한편에 철학 전집이 있었다. 총 세 권에 하나당 두께가 상당했다. 오호라. 출판사도 이데아…. 안 살 수가 없었다. 어머니와 동생이랑 대화하다가도 생각이 났다. 누가 먼저 사버릴까 전전긍긍. 그래서 주차장으로 가기 전 혼자 얼른 뛰어가 그 무거운 책을 사서 가게를 나왔다. 그 모습을 보고 어머니가 철학책인 걸 아시자마자 되물었다. “보면 괴롭지 않니?“

마치 홀로 낚싯줄을 잡고 견디는 노인처럼. 새벽에 아파져 오는 눈의 반쪽을 감고도 끄적이는 행위가 재밌었다. 그리스어를 라틴어, 영어, 그리고 한글로. 누가 보기엔 우스웠던 각주 해석.
내 나름대로 깎고 세공해서 단락에 올리고. 궁금한 것이 생기면 도서관에 챙겨갈 포스트잇에 끄적여 두고. 활자를 캐다 보면 빛이 보였다. 어느 날은 세공사, 어느 날은 대장장이가 된 것처럼, 활자를 탕탕. 불에 지지고 날을 갈며 윤기를 내던 하루하루. 책의 활자들이 자그마한 원석과 같이 종이 위에서 도르륵. 종이를 할퀴며 굴러다녔다. 그럼 그걸 조심스레 줍고. 들여다보고. 그게 그렇게 좋았다.

세상의 빛까진 아니더라도, 다른 이들의 논문처럼 내 논문도 양장본이 될 줄 알았다. 논문 심사 전, 교수님은 한 학기는 조교 일을 쉬고 내가 캔 원석을 더 세공하라고 하셨다. 그러다 조교 계약 만료 전, 교수님은 곧 수료생이 되어 일을 못 할 나를 대신해 나에게 명의를 빌려줄 학생과 상담했다. 아, 그제야 깨달았다. 다 쓴 논문의 서론만 몇 달 동안 수정 하라던 교수.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학교 교칙까지 뒤지라며 꾸짖던 그의 지도. 매 시각 울리던 전화. 통제된 압존법. 사리사욕의 스터디. 예찬과 꾸짖음. 영수증 증빙. 그릇된 정신. 정신과 약물, '정신'과 약물. 필요시, 비상시 연락. 내 낭만의 시간, 눈물. 그는 나를 꾸짖을 때 가끔 '네가 선택한 길인데 잘 해야 하지 않겠니?'라며 코웃음을 쳤었다. 그래, 내가 택한 길이었지. 넌 나란 인간을 그저 체스 말처럼 써버렸구나. 체크메이트를 앞둔 말, 두 칸 정지. 판을 엎다니, 날 엎었구나. 나뒹구는 체스 말, 시체처럼 던져진 난 눈알을 도르륵 치켰다. 도르륵.

어리석은 자에게 배움을 구걸하다니. 그래, 내 선택이니, 항해를 멈추겠다.
타오르는 불에 물그릇을 던졌다.

쾌쾌한 낯에 얼굴이 익어버린 대장장이. 빈손.
비루해 보일지라도 철학이 좋았다.
그러나, 그래. 그만.

낭만이 무엇인가.
누구에게 물어도 그 답을 가벼이 하지 않으리.

세공된 내 보석은 티끌 같았다. 작아서 눈알이 빠질 만큼 가까이 보아야 빛이 났다. 그 판을 엎었다. 손에 있던 빛이 의자에 튕겨 나갔다. 분명 작업대 밑, 바닥에 떨어졌는데…. 주워야 하는데.... 몸이 토막 났다. 지도 교수 밑에서 일하며 논문을 쓰던 1년,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강둑에 버려진 마네킹처럼 몸통만 있는 채로, 팔다리가 잘린 꿈을 자주 꿨다. 어떤 날은 아스팔트를 기어가고 어떤 날은 몸통만 몸부림치며, 한없이 비 오는 날 어딘가 버려진 나를 많이 봤다. 통제 밖의 일에 체념했다. 그건 잠에서 깨고 학교에 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랬기에.

이제 내가 말한 낭만의 맛을 느꼈나?
그럼 난 내가 물고 있던 담배를 입에서 놓겠다.
쓰다. 썼고. 사실은 피지도 않는다. 술도 안 먹는데 무슨.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라며 말한 이는 도망을 쳐 본 적이 없는 인간일 것이다. 죽기 살기로 도망치는데 무슨 낙원을 기대해?
도망치는 나에게 마지막 술자리에서 한 선배란 사람은 '그래도 철학은 못 놓는다'라며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그래, 철학을 놓진 않겠지. 집 가는 길, 나는 생각했다. 고로 존재한다고, 이 마음이.

이 마음을 낭만이라 여길까?

이 페이지에 낭만은 씁쓸한 맛이 난다. 어쩌면, 삶에서 원하는 길을 향해 걸어가는 것, 이것을 낭만이라 치부하기엔 낭만이란 단어는 너무 넓은 바다 같기도 하다. 너무 넓고 깊고 끝이 없다. 낭만이 이렇고요, 저렇고요 하기엔 살아온 삶이 짧다. 마냥 넘실거리는 단어는 아니다, 낭만은. 적어도 내가 겪어 본 바로는 노인과 같이, 얼굴이 시뻘건 대장장이처럼 힘에 부쳐 휘청거렸다. 그저 내가 탄 배가 많이 흔들렸고, 파도가 셌다. 회고하자면 배를 바꿔탈걸, 고개만 살짝 들었어도 정착지가 있었는데 조금 쉬어갈 껄, 그저 그럴 뿐이다.

사실 지금도, 넘실거리는 다른 색의 바다가 보인다. 발을 살짝 담가보고 괜찮으면 수영하든, 배를 타든.
휩쓸리지 않고 항해를 하면 된다. 힘들면 정착지에 잠시 내려 쉬어가도 된다.
왜 그렇냐고? 나의 길이니까. 내 낭만이니.
파도치는 바다에선 그래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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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아
안녕하세요. 데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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