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낭만'이라고 하면 뭐가 떠올라?"
"7080"
핸드폰을 보고 있던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0.1초 만에 나온 대답이었습니다.
젊은 날의 청춘. 이제는 잡을 수 없는 기억.
올여름에 친구들과 인천 을왕리 해수욕장에 놀러 갔습니다. 새벽에 바닷가에 돗자리를 펴고 친구와 인생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앉아 있는 시간 내내 관광객들이 저희 앞뒤 양옆으로 불꽃놀이를 무제한 제공해 주셨습니다. '평생 볼 폭죽 다 보는 것 같다' 하며 얘기를 하는 중에, 여성 두 분이 저희 바로 앞에서 막대 폭죽을 들고 하늘로 쏘고 있었습니다. 언어를 들으니 중국인 같았고, 스무 살 초반처럼 보였습니다. 한껏 꾸민 두 사람이 양손에 폭죽을 들고서는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꺄르르 웃고, 다른 한 분은 열정적으로 그 장면을 찍어주고 있었습니다. 바다를 향해 폭죽을 쏘면서 '아브라카다브라!'를 외치는 걸 보니 절로 웃음이 났고 보기 좋더라고요. 정말 청춘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듯했습니다. 그 친구들은 귀국하고서도 지금 순간을 추억했겠죠.
청춘과 낭만은 젊어야지만 가능할까요?
점심쯤에 해수욕장에 도착했을 때, 입구에 기타를 치고 있던 아저씨가 계셨습니다. 가져오신 것처럼 보이는 의자에 앉아 혼자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와 진짜 낭만 넘친다."하고 지나갔죠. 저희는 바닷가 수영을 하고 카페도 갔다가 저녁으로 술까지 한잔하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아저씨는 계속 기타를 치고 계셨습니다. 자세히 보니 옆에 소주 한 병과 물 한 병이 추가되었더라고요. 얼큰하게 취하신 상태로 점심때보다 훨씬 파워풀하게 연주하셨습니다. "와.. 나도 저렇게 낭만 넘치게 늙어야지." 했습니다.
7080을 그리워하는 저희 아버지도 꽤 낭만적으로 사십니다. 법적 노인의 나이로 통기타 연주를 해서 공연도 간간이 다녀오십니다. 본 직업은 음악과 전혀 관계없으시지만, 고등학생 때부터 통기타를 연주하신 거로 압니다. 지금도 자는 시간 외에는 기타만 새벽까지 연습하십니다. 뭔갈 하나를 몇십 년 동안 놓지 않고 꾸준히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낭만이라 생각합니다. 나이 스무 살 청춘이라 한들 무언가 하나를 40년 하지는 못했을 거니까요.
제 또래의 낭만은 스무 살 초에만 가질 수 있는 풋풋하고 불꽃 튀는 연애라거나, 젊은 체력으로 다니는 해외여행이라거나 등이 있겠죠. 어머니 아버지의 젊은 날의 낭만은 손 편지로 이야기하거나, 집 전화기로 누군가의 연락을 하루 종일 기다리거나, 삐삐의 숫자로 마음을 전하거나 하지 않았을까요. 제가 어릴 때까지만 해도 집 전화를 받으려면 선이 닿는 곳까지만 이동할 수 있으니, 전화기의 꼬부랑 선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면서 전화하곤 했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어릴 적에 먹은 음식들을 그리워하시더라고요. 그때 먹은 날것의 과일이라거나 메뚜기를 잡으러 다닌다거나요. 어머니는 어릴 때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서 친구들이랑 단체로 산을 넘어서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단체로 소식이 끊기니 부모님들이 산으로 뛰어갔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세대에서는 거의 일어날 일 없는 일들이죠. 그 당시라 가능했던 낭만적인 분위기가 있었을 거로 생각합니다.
부모님과 같은 시절, 혹은 더 옛날을 살아오신 화실 회원 선생님께서는 직업을 은퇴하시고 3년간 계속 그림을 배우고 있으시다고 합니다. 평균 30호(약 90cm)의 작지 않은 크기의 그림을 3년 동안 44점을 완성하셨다고 하셨습니다. 한 달에 1점 이상을 작업하신 겁니다. 그림을 처음 배우셨다 하셨는데, 이렇게 부지런하고 꾸준히 하셨다는 이야기는 그림 그리는 과정을 즐기셨다고 해석이 됩니다. 은퇴 이후의 나이에 좋아하는 게 있다는 것은 낭만이라 생각합니다.
최근엔 가수에 빠져서 콘서트에 가는 어르신들이 많다고 합니다. 친구 부모님들도 그러시고요. 친구들은 그런 본인들의 어머님을 보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취미 없이 집에만 계시는 것보다 훨씬 생기 있어 보이고 좋은 것 같다." 바닷가 아저씨도, 저의 아버지도, 화실 선생님도, 나이와 상관없이 가슴 뛰는 일이 있다는 건 낭만적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르신들은 젊은 저를 보면 자꾸만 20대, 30대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씀하십니다. 분명 젊은 날의 낭만도 있을 것이고, 지났기에 가치가 높아진 낭만도 있을 것이고, 나이가 들었기에 가능한 낭만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나간 순간은 돌이킬 수 없고, 모든 나이에는 그에 걸맞은 낭만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한편으로는 나이를 먹는게 아쉽지만 동시에 두근두근합니다.
좀 더 정확히는 나이도 세대도 상관없이 '시간을 잊는 순간'이 낭만인 것 같습니다. 무언가에 푹 빠져서 시간 가는 줄 모를 때, 그 순간이요. 사랑이든 취미든 장소든 장면이든 뭐든요. 그 행동이 영양가가 있든 없든 순간을 즐기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밤에 술 마실 때 시간 가는 줄 모르겠더라고요. 바에서 새벽까지 바텐더분들과 수다 떨고 나서 기절하듯 잠에 들고 일어나면, 한여름 밤의 꿈처럼 남습니다. 술에 취해 불투명해진 그 기억이 당장 12시간 전의 일인데도 추억이 된 듯한 기분이 들거든요.
낭만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는 인지를 못 하더라도, 남들이 봤을 때는 누가 봐도 '낭만적이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 밤바다를 향해 아브라카다브라를 외치던 학생들처럼요.
굳이 낭만을 찾지 않아도 무언가를 즐기고 있다면 낭만은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