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별에 숨결을 담아
물의 별에 숨결을 담아
2025.11.08
부엽토·⌛16분

96조 700억. 지구별 하루치 단어 생산량입니다. 인간이 인간에게서, 입술에서 나오는 말로, 손가락에서 쓰이는 글로. 그렇게 인간은 언어를 통해 서로에게 신호를 보냅니다. 몸짓 언어 따위의 비언어적 신호는 제외한 숫자입니다. 1년 치를 따지면 3경 5,065조 단어가 물결치며 지표면을 흐르는 셈이군요. 서로에게 할 말이 왜 그다지도 많을까요.

언어의 홍수를 어떻게 셈했냐고요? 계산을 해봅시다. 전 세계 인구 약 82억. 영유아 이하 인구는 대략 10% 추정. 즉, 대략 73억 8천만 명이 언어 사용자. 연구에 의하면 하루 평균 대화량은 평균 13,000단어 정도. 그렇다면 7,380,000,000 x 13,000 = 95조 9,400억. 메신저와 SNS를 통한 하루 대화량은 AI 추정 하루 1,300억 단어. 고로 총합 96조 700억 단어. 계산 끝! 정확한 숫자라 하긴 힘들겠지만, 어차피 정답을 아는 사람은 없으니 대강 적절한 추정치라고 칩시다.

이 행성에서 이토록 많은 단어가 범람한 적은 일찍이 없었죠. 지구별이 생긴 이래, 원시 생명체부터 공룡과 맘모스까지 무수한 신호를 발했겠지만, 문자 언어가 쓰인 기간은 찰나라고 말하기에도 짧은 기간이니까요. 46억 별의 역사를 따졌을 때, 문자 언어가 사용된 기간은 고작 5천 년 전 즈음입니다. 즉, 별의 역사에서 문자가 쓰인 기간은 천만 분의 일. 0.00001% 정도네요. 상대적으로 무척 짧은 기간이지만, 인간에 의해 언어 사용량은 폭발적으로 늘었습니다. 0에서 96,070,000,000,000이 된 거죠.

언어가 낭만이 될 수 있을까요? 방파제에 부딪히는 순간, 새하얀 물거품을 피워올리며 비산하는 물결을 떠올려봅시다. 새파란 파도, 암회색 방파제, 충돌, 뽀얀 거품, 무수한 물방울. 이 물방울 하나하나가 우리가 꺼내어놓는 언어라고 상상해 봅시다. 저는 그때 낭만浪漫이라는 단어를 떠올립니다. 한자에 담긴 뜻 그대로 넘쳐 올라 흩뿌려진 물결이죠. 인류가 서로에게 발하는 언어의 물방울이 모여 거대한 파도가 되고 매일매일 별 위에 물꽃을 피워올리는 셈이죠.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던가요. 지구별 단위로 보면 아름다울 광경도 돋보기를 들이대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언어의 양에서 질로 넘어가 볼까요? 100조 가까운 단어를 인간이 서로 주고받는다면, 과연 어떤 의미를 나누고 있을까요? 비난, 시기, 미움, 불안, 질투, 냉소, 혐오, 심판, 회피가 온천지에 흐르는 모습을 상상하면 몸서리가 쳐집니다. 혹은 감사, 환대, 지지, 응원, 격려, 칭찬이 서로를 휘감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빛이 나네요. 그런데 이 글을 쓰는 저조차 왜 전자에 속하는 단어가 더 쉽게 떠오를까요? (제가 욕을 좀 많이 하긴 합니다) 그렇다면 대체 언어의 파도로 피워올린 물꽃의 꽃말은 무엇일까요.

‘착한 말하고 삽시다’ 같은 진부한 도덕주의를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제 의도는 유미주의랄까요. 아름다운 대화에 대한 동경에 가깝습니다. 낭만이라는 한자가 1. 넘쳐 올라 흩뿌려진 물결, 2. 얽매인 현실에서 해방시켜주는 감성. 두 가지를 뜻한다면, 96조 700억의 ‘대화’ 중에 우리를 해방케 할 말의 비중은 얼마나 될까요? 해방이란 말이 거창하다면, 우리는 서로의 내면에 얼마나 관심을 두고 있나요. 다시 말해서, 내가 자유로이 토해놓는 말도 좋지만, 내가 경청함으로써 너머의 누군가를 꺼내어놓게 하는 말을, 그 말을 깊이 헤아리고 조심스레 꺼내놓을 한마디의 비중은 얼마나 될까요?

막막하죠? 엄청난 숫자를 꺼내었는데, 그 숫자가 대부분 필터에 걸린 허수가 되는 모양새군요. 지구적 차원에서 ‘대화’는 그 자체로도 낭만일 수 있지만, 일상적 차원에서 ‘낭만적인 대화’는 무척 드물기 마련이지요. 모순적이군요. 이 막막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일상으로 돌아가야겠군요. 천체 망원경이 필요한 행성 단위의 이야기를 했으니, 이쯤에서 우리가 숨 쉬는 삶에 현미경을 들이대 봅시다.

이쯤에서 고백 하나 할까요. 지금까지 잘난 듯 이야기했습니다만, 저는 일상에서 대화로 숨통이 트이는 경험을 거의 해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입을 닫는 쪽에 가깝죠. 제 별명이 바로 ‘돌부처’거든요. 바둑을 아는 분이라면 익숙한 단어일 겁니다. 이창호 9단의 별명이 바로 ‘돌부처’죠? 결승전에서도 무표정한 채로 대국에 임하는 이창호 사범의 입꼬리는 :( 이모티콘과 닮았죠. 저도 그렇습니다. :( 표정을 한 채로 말이 없는 돌부처처럼 살았죠.

왜 그랬을까요. 사람은 돌이 아닌 데도요. 우리 몸의 구성 성분을 따져보면 돌보다는 물에 가깝죠. 사람 몸의 70%는 수분이라고들 하니까요. 그럼에도 물이 아닌 돌처럼 살아가는 누군가가 있다면, 힌트는 바로 대화에 있을 겁니다. 다만 소통보다는 불통이죠. 흔한 이야기입니다만, 가장 가까워야 할 사람들과도 대화하기 싫을 때가 있지 않나요? 저는 가족, 특히 아버지와 그랬습니다. 대화가 부족했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대화가 많아서 불편했죠.

어떤 대화는 하지 않느니만 못하죠. 아버지와 제가 그랬습니다. 제 의견을 꺼낼라치면 비난이 앞서니 분노에 찬 나머지 다투었다가 서로 빈정 상하기 일쑤였죠. 진흙탕 대화에 빠진 채 열불이 차올랐다가 우울로 떨어지며 감정이 널뛰는 걸 반복 하다보면 돌부처로 행세하는 게 편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이상한 일은 아니겠죠. 그렇게 비난과 냉소는 무표정으로 넘기고, 어쩌다 타인에게 받는 지지와 격려도 어색한 성인이 되었습니다.

대화라는 물줄기가 오염되어 탁류가 되느니 차라리 메마른 황무지가 낫다는 심정이었죠. 그래도 사람은 대화가 통하지 않으면 살기 어렵습니다. 어찌해야할까요. 제 결론은 바로 독서였습니다. 책은 참 신비하죠. 손 한뼘보다 조금 큰 15.2cmX22.5cm 사이즈의 책이 내 마음과 맞으면, 그 속에서 헤엄이라도 치고플 정도로 너른 저수지처럼 느껴집니다. 저에게는 플라톤과 니체, 카찬차키스와 헤세가 그랬죠. 그렇게 저는 산 사람과 대화를 거부하고 죽은 사람들의 말에 탐닉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참여하기 시작한 독서 모임은 다른 지평을 열어주었습니다. 거기엔 저와 비슷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일상에서의 불통, 모임에서의 소통이라는 생경한 경험을 즐겼던 거죠. 매주 참여할 정도로 몰두하곤 했는데요. 사실 돈도 안 되는 독서모임에 몰두하는 건 직장인 입장에서 쓸모 있는 일이라 하기는 어렵죠. 그런데 왜 그랬을까요. 어쩌면 산업화 세대, 일상의 모든 루틴에 강박적으로 쓸모를 찾는 아버지의 언어에 대한 반감으로 그토록 쓸모없는 일에 매달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수지에 고랑을 파서 동서남북 물길을 잇듯, 책을 통한 대화로 타인과 대화하다 보니 제 속의 응어리도 조금씩 풀리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혼자만의 고통에 빠져있었는데,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도 많았고요. 타인 속에서 흘러나온 대화를 경청하고 다시금 말을 건네다 보면 물줄기가 모여 바다로 통하는 듯한 느낌이 들죠. 좀 거창한가요? 하지만 자신의 언어로 타인과 소통하는 일은 결코 과소평가될 일이 아닙니다. 주체성을 되찾는 과정이라고 해도 될겁니다. 그러다 보니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느 순간 아버지와 다투지 않고 대화하는 일이 가능해졌다는 거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수십조의 물방울로 무수히 피워진 대화의 물꽃이 우리를 휘감고 있을 겁니다. 요즘은 메신저와 SNS 덕분에 집에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게 아닌 셈이니까요. 삶이 아이러니한 건 그 무수한 대화 속에서도 우리 삶은 황무지에 비유할 수 있다는 거죠. 돌이켜보면 저도 아버지의 세계를 지나오는 동안 메말라 쩍쩍 갈라진 땅을 터벅터벅 걸어온 셈입니다. 그땐 목마른 사람처럼 숨 막힌 채 헐떡였죠. 애써 표정을 숨기며 돌부처로 행세했고요. 하지만 그렇게 살 수만은 없는 법이죠. 그렇기에 저는 자신의 숨결로 돋아난 단 하나의 새순을 기다립니다. 분명 그게 우리를 구원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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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엽토
안녕하세요. 부엽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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