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영화를 말할 때, 빼놓지 않고 이야기하는 영화다. '여덟개의 산’
“내가 뿌리 내릴 곳은 우정이었다.” 라는 포스터의 문구에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알프스가 배경이지만 절대 화려하지는 않은, 고요하지만 뭔가 덮쳐올 것 같은 왠지 모를 긴장감, 서로를 의지했지만 너무 다른 둘의 30년이 넘는 세월, 그럼에도 끝내 서로에게 닿지 않음에 꽤 쓸쓸해지는 적막 속에 두 시간 넘게 이어진다.
산에서 나고 자란 산쟁이 브루노. 산이 자신의 집인 브루노는 여유롭고 평화롭다. 도시에서 태어난 피에트로는 산을 갈망하고 브루노를 동경한다.
'인간은 결국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다, 산은 인간을 해하지 않는다.'는 맹목적인 믿음으로 산에 뿌리 내린채 살아가는 브루노, 정착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이 산 저 산 떠돌아다니며 자신의 길을 찾는 피에트로의 삶이 대비되어 비춰진다. 확신하는 브루노. 방황하는 피에트로.
네팔 전설에는 세상의 중심에 ‘수미산’이 있고, 그 주위에 여덟 개의 산이 있다고 한다. 중심 산을 상징하는 브루노와 여덟 개의 산, 즉 주변을 떠돌며 방황하는 피에트로가 있다.
겨울방학이 되어 아버지와 함께 빙하를 보기 위해 겨울 산을 오를 때, 흔들림 없이 가볍게 산을 오르는 브루노에 비해 피에트로는 고산병으로 주저앉게 된다. 피에트로는 브루노를 닮고 싶어했던 것 같다. 자신의 나약한 모습과는 반대로 늘 단단하고 묵묵하게 중심을 잡고 발걸음을 내딛는 브루노를 보며. 때론 가지지 못한 것을 동경하게 되니까.
산의 정상과 중턱, 알프스 봉우리 중심과 주변.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정상을 찍어야만 되겠다 싶을 때도 있고, 흔들림없이 단단하고 한결같은 모습을 갈망하게 되기도 하지만, 사실 높고 단단한 산도 끊임없이 변한다. 깎이고 무너져 중심이자 정상이었던 그 곳이 무너지고 가라앉기도 한다.
산이 자신의 세상에 전부였던 브루노는 피에트로를 만나게 되며 새로운 삶을 꿈꿨을지도 모른다. 자신도 글을 배우고, 공부하고, 넓은 세상을 경험하며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꿈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브루노의 꿈은 자신을 동경하던 피에트로의 한마디, 당신의 세계에서 나오는 법을 몰랐던 그의 가족에 의해 무너지고, 또다시 산에 뿌리박힌다. 그런 브루노를 사랑하는 새 가족이 생기지만, 브루노와는 다른 삶을 살아온, 살아가는 가족들에게 고립된 산은 너무 가혹했다. 변하는 세상 속에서 산에 뿌리내릴수록 삶은 고단했고 무거워졌다. 자식을 위해 좀 더 나은 곳으로 떠나자 어렵게 말을 꺼냈던 아내에게 브루노가 건넬 수 있는 답은 산 뿐이었던 것 같다. 자신이 자신할 수 있는 정답은 산 뿐이었다. 브루노는 자신의 전부인 산을 포기하지 못하고 가족들을 놓는다. 어쩌면 평화로웠지만 외로이 뿌리박힌 자신의 삶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준 가족들을 산에게 빼앗겼을 때도 브루노는 산을 믿었을까. 흔들리진 않았을까. 이미 너무 멀리와 그럼에도 끝끝내 산으로밖에 돌아갈 수 없었을, 산을 내려오는 방법을 도무지 몰랐을 브루노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각자의 삶을 살다 어느 때에 다시 만나게 된 피에트로와 브루노는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오르던 산 중턱에 집을 짓는다. 둘은 어디선가 가져온 작은 나무 한그루를 집 앞에 옮겨 심는다. "이 작은 나무가 살 수 있을까" 묻는 피에트로의 질문에 브루노는 "태어난 곳에서는 강하지만 옮겨 심으면 죽기 십상이야." 라고 답한다. 하지만 브루노의 말과 달리 작은 나무는 끝내 험한 지형과 기후를 견디며 잎을 피워낸다.
가족들과 헤어진 브루노는 산 중턱에 지은 집에서 혼자 살아간다. 종종 찾아와 곁에 있어주는 피에트로에게 이런 말을 한다.
“세상엔 여덟 개의 산과 바다가 있대. 그 중심엔 커다란 산이 있어. 수미산이지.
여덟 개의 산과 바다를 여행한 자와 수미산에 오른 사람 중에 누가 더 많이 배울까.”
산의 일부인 브루노는 끝내 산에게 꺾였고, 산 정상에 오르지 못해 여전히 산을 찾던 피에트로는 계속해서 산의 주변을 떠돈다. 산에 오를 수 없음을 받아들인건지 여전히 주변을 떠도는 피에트로의 얼굴이 편안해 보였다. 꼭 오르지 않아도 괜찮아진 듯. 다르게 오를 수 있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은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떠돌다 피에트로는 네팔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되고, 또 다른 미래를 그린다. 산이 아닌 피에트로가 딛고 있는 바로 그 곳이 중심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오래 뿌리내린 믿음은 때로 우리 자신을 해하기도 한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디서든 정착할 수 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둘의 묘한 대비는 우정만을 말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이 영화는 결국 인생을 말하고 있다. 오르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다. 확신이 위험할 때도 있다. 오르고 내리고, 오르고 내리고. 그것이 삶이다. 끝내 오르지 못해도 괜찮다. 꼭 무언가를 찾지 못해도 괜찮다.
오랜만에 등산을 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얕은 눈을 밟으며, 마른 겨울동산 풍경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산내음을 들이마시다가 적당히 오른 중턱 어디쯤 힘이 들면 내려와 기가 막힌 식당을 찾는거다. 막걸리 한 잔 들이키면 정상에 못 오른 거 쯤이야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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