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붕어는 어느 의미에서 보면 이미 생명을 가진 물고기가 아니라 인간의 의도에 의해서 창작된 미술 공예 생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연못에 넣고 기를 때는 위에서 내려다봄으로 그 품종 개량은 퍼진 지느러미나 꼬리에 집중되고 유리 어항이 생기면 측면에서 감상하기 때문에 옆 모습 특히 눈 부위가 새롭게 개량된다. 특히 중국이나 일본의 상가에는 금붕어를 매달기도 해서 아래서 위로 쳐다볼 때의 하복부까지도 신경을 쓰게 되는 것이다. 금붕어의 품종 개량은 일본인들이 자랑하는 나팔꽃처럼 다양한 변화를 겪어 오늘에 이르렀지만 한마디로 그것은 금붕어 자신이 아니라 감상하는 인간들의 기호와 취미에 의해서 진화되어 왔다. 자연 도태가 아니라 문화적인 인공 도태가 되어 사라지는 금붕어들이 있고 거꾸로 유행을 타서 몸값과 그 존재가 급부상하는 것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금붕어는 인간이 자연에 대해 해 온 모든 욕망, 변조, 파괴의 과정을 한눈으로 볼 수 있게 한다.
금붕어는 아름답다. 금처럼 찬란하다. 이 귀엽고 아름다운 금붕어 뒤에는 섬뜩한 인간의 문명에 대한 고발이 있고 그것을 바라보는 내 스스로가 금붕어와 똑같이 그 문명의 희생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금붕어를 학교로 옮겨오면, 수능시험이나 학교의 커리큘럼 같은 것에 의해 바뀌는 학생들이 된다. 스스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모이를 주는 사람들(선생이나 부모)의 손에 의해 변화한다. 학교 교실이 금붕어의 어항이라고 한다면 전체 학교의 방침, 교육부, 국가의 방향에 의해서 주입식 교육과 훈련을 받은 학생은 금붕어와 같다.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바뀌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에서는 중국이나 일본에서와 달리, 금붕어 개량도, 나팔꽃 개량도 인기를 끌지 못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금붕어도, 개량된 나팔꽃도 키우지 않았다. 일본의 무사들과 달리, 한국의 선비들은 인위적으로 생명을 조작하는 것에 흥미를 가지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금기시했기 때문이다. 중국에는 낙타사라고 해서 직업적으로 나무를 전정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일본 역시 그랬다. 심지어 중국의 전족, 일본의 흑치 등, 중국과 일본에는 신체를 인위적으로 변형하는 치장법이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정원이나 화초를 가꾸는 데 있어서도 있는 그대로의 것을 존중했지 품종개량은 하지 않았다. 인체의 변형을 가해 인공적인 미를 추구하는 모습도 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생명에 무언가 인위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 이것을 바로 문화물질이라고 하는데, 전 세계적으로 이러한 문화적인 인위성이 위력을 떨칠 때에도 한국에서만은 그것을 금기시한 것이다.
그래서 상업도 발달하지 못하고, 산업화도 늦어진 것인지 모른다. 산업주의와 상업주의가 서로 손을 잡고 과학기술의 주도 하에 만들어가는 상품화 시장, 혹은 상품 경제에 있어 한국은 분명 다른 나라들을 앞서지 못했다. 이것을 과연 어떻게 보고,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산업사회의 물질 기술에 뒤이어 도래한 생명기술, 즉 바이오테크놀로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황우석 소동에서 알 수 있듯이 한동안 우리는 바이오 기술에 있어 세계를 선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우리가 생명기술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앞으로 어떠한 길을 열어나갈지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다가오는 생명기술의 시대에 바이오테크놀로지가 자본주의와 결합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이는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에 있어 매우 절실한 문제인 것이다.
미래 기술의 핵심은 바로 IT, BT, NT의 세 기술이라고 한다. 한국은 이미 IT의 중심지이고, NT에 있어서도 경쟁력을 지니고 있다. 최근에는 인천이 그린 테크놀로지로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과학기술을 통해 산업주의를 주도해온 서양 사람들이 인류 전체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듯이, 생명기술의 중심에 들어선 한국인들이 앞으로 어떤 정책을 써나가게 될 것인가는 전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다. IT, BT, NT를 주도해 가야할 한국인들은 국내만이 아닌 한 인류의 문명 문화에 참여하면서, 새로운 자본주의를 만들어내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한국뿐만 아니라 전 인류의 미래가 달라지게 될 것임은 분명하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잘 길들여진 인공의 공예품 같은 금붕어에서 그 야성을 보는 것이다. 가축, 애완물, 문명인 모두에게 배꼽의 추억과 같은 생명의 신비함이 잠자고 있다. 그것을 흔들어 깨워라. 나는 지금 생명이 무엇인지 어떤 이론이나 실험을 통해서 보여줄 수도 없고 믿지도 않는다. 나에게 있어서 생명이란 바다에서 보쌈으로 붕어를 잡고 그것을 손으로 잡았을 때 마치 물고기가 그물에 걸린 것처럼 은빛 비늘을 파닥거리면서 꼬리를 치던 그 감각. 비릿한 냄새, 비늘 하나하나가 햇빛처럼 반짝이며 파다닥거리는 그 생명의 진동에서 나는 생명이 무엇인지를 느꼈다. 손바닥으로 전달되는 싱싱한 생명에 자석처럼 끌리는 힘. 전기를 쏘인 것처럼 찌릿하게 오는 그 신선함. 그것은 아마도 몇 십 억년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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