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나의 외모는 __다." 새학기가 되면 아이들에 대해 알아가고자 여러 문항의 빈칸을 자신의 생각으로 채우는 질문지를 준다. 여기에 한 학생이 적었던 문장은 "거울을 마주하기 두렵다."였다. 고등학교 2학년, 우주처럼 팽창하고 변화하는 몸안에 갇힌 나는 여전한 아이어서 그런 생각을 했었다. 변하지 않았는데 변하는 것들 그 간극에 현기증이 일었고, 왠지 울적한 마음이 들었다. 어떤면에서 그 학생의 마음을 잘 안다고 생각한다. 나를 마주하기 두려운 마음을.
사람 좋은 웃음을 하고 자조적으로 내보일 수 있는 말들에는 한계가 있다. 내가 가진 '진짜' 콤플렉스는 쉬이 목구멍이 아니라 가슴에 걸린다. 내가 가졌던 가장 큰 상처도, 내가 아는 나의 가장 큰 흉도. "어떻게 그렇게 착하니, 배려심이 넘치니"와 같은 말들로 나를 구속하려는 사람들에게 반발하는 감정이 일지만, 여전히 나는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고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봐 조바심을 낸다. 성적인 대상으로 바라보는 은근한 눈빛을 볼때 경멸과 혐오가 일지만, 한편으로는 누군가에게 여전히 욕망되는 존재이고 싶다.
대학생 때 ‘작품론’이라는 전공과목 수업이 있었다. 자신이 맡은 영화에 대해 분석하고 발표하는 수업으로, 그날은 김기덕의 ‘피에타’에 대해 얘기했다. 교수님께서 소개하는 대부분 알고 있는 나에게 그날 교수님은 ‘피에타’를 보았느냐고, 어땠는지 물으셨고 나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살아가는 게 두려워졌어요.”라고 답했다. 교수님께서는 그 대답을 듣고 실망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시며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러니까 거기 나오는 수많은 범죄가, 범죄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셨던 것 같다. 좋아하는 교수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뜨거워 더 잘 대답할 순 없었을까 고민했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도,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정말 그 영화를 보고 느낀 것은 ‘자신이 없다.’였다. 살아갈 자신이. 앞으로 살면서 만나게 될 수많은 위협과 위험, 폭력, 협박, 약취와 유인, 강간, 살인만이 무섭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피에타는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상을 말한다는데, 영화 피에타에서 느껴지는 자비는 멀고 공허하게 그려진다. 마치 쥘수록 노력하면 할수록 잡히지 않는 비의 근육처럼. 입에 담지도 못할 악행을 하는 주인공의 죄는 참혹할 정도로 무거운데, 그런 사람도 기계로 바짝 누른 것처럼 납작하지만은 않고, 복잡하다. 나는 유능하지 못해도 착한 사람, 이라며 자위하고 살아왔는데, 나 역시 깨끗하지만은 않다는 걸 스스로는 잘 알기에. 마지막 장면 새벽녘 출발하는 트럭에 몸을 묶고 피로 자신의 행보를 참회하는 모습을 보며, 내가 살면서 저지른 죄, 그 죄들을 떠올리니 정말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 나는 살아가면서 또 얼마나 많은 잘못을 범할까. ‘벌’로써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타인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될 죄.
‘죄’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마다 어릴 적 동네에서 놀던 아이들이 사마귀를 죽이던 장면이 떠오른다. 사마귀는 자신을 둘러싼 우리를 향해 갈퀴를 세운 채 두려워하고 있을 뿐이었는데 아이들은 징그럽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돌로 그를 내려찍고, 욕하고, 비웃었다. 하지 말라고 소리지르면서도 죽어가는 사마귀가 너무 징그러워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던 것이 기억난다. 왜인지 어른이 된 지금도 거미, 지네, 쥐, 바퀴벌레 등 내로라하는 기피 생물 중 ‘사마귀’를 가장 무서워하는데 그날 터진 배에서 끈질기게 살아 움직이던 연가시를 보고 느꼈던 충격이 선명해서인가. 그 질긴 생명력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징그럽다.’였다. 친구들의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그들의 입꼬리는 기억난다. ‘작은 악의’. 모르기도 하지만, 완전무결하게 모르지는 않아서 더 재미있는 폭력과, 옆에서 그저 지켜보는 정도로, 직접 개입하진 않지만 올라간 입꼬리. 그걸 바라보는 나.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어떤 존재가 ‘유린’ 당하는 상황의 불쾌감과 이상한 징그러움으로 며칠을 무겁던 날들. 나는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살아가며 그와 닮은 나의 모습들을 볼 때면 소리없이 올라가던 그 작은 입꼬리가 생각난다.
고백하자면 나의 악의와 관련된 장면이 몇 있다. 어릴 적 같이 살던 고양이를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괴롭혔던 것, 운동회에 온 할아버지를 보고 나도 모르게 친구들이 내가 부모님이 없어서 할아버지가 온 것으로 생각할까봐 모른척 한 것, 사춘기라는 이름으로 부모님께 개같이 굴었던 것, 결혼식 주차장에서 화를 내고 굳이 그 아르바이트생을 몇 번이나 허리숙여 인사하게 만드는 아저씨를 보고 혀를 차면서 나 역시 제대로 된 안내를 해주지 않았다고 평소에 낼 수 없는 짜증을 내는 모습. 그 언젠가 내가 분명하게 쉬어 누군가에게 가닿았던 한숨, 그리고 솔직하게 쓸 수 없어서 스스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되어버린 수많은 일들. 그런 것이 나의 삶 속에 함께 있다는 것이 두렵다.
그 조용한 ‘악의’는 때로 스스로를 향하기도 하는데, 나는 내 마음속에서 늘 나를 벌하는 판관으로, 내가 더 좋은 사람이지 못하고, 똑부러진 사람이지 못하고, 예쁘지 못하고, 기대하는 만큼 착한 사람이지 못하고, 헌신적인 사람이지 못하고, 유능하지 못하고, 변명하지 않고 올곧은 사람이지 못해서 무언가 잘못되고 누군가 상처를 받는 일이 생기면(설령 그것이 나일지라도) ‘네가 그럼 그렇지. 역시 그럴 줄 알았어.’라고 죄를 가리며 모욕적인 말들을 했다. 네가 형편없는 사람이라서 그럴만한 욕을 먹는거야. 라고 생각하면 이유가 있기 때문에 덜 상처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언젠가부터는 그렇게 스스로를 탓하며 이상한 통쾌함을 느끼기도 했던 것 같다. 몰아붙이고 나는 할 말을 했다는 표정으로 차갑게 내려보는 것. 스스로 힘들면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방식이라고 생각했고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다고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아니었다. 어느 하나도 진실에 가깝지 않았다.
이제 나는 맨 얼굴이 부끄러운 사람이 되었다. 일상을 살면서 맨 얼굴로 나가는 일은 거의 없다. 적당히 가리고 보완한 모습으로 있는 시간이 더 오래여서일까 언젠가부터 그 모습을 나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러다가도 어느 날은 대상 모를 미안함이 든다. 누구나 저마다의 사정으로 다양한 페르소나를 쓰고 살아간다지만 이제껏 지나온 나라는 시간을 외면하는 것 같아서. 앞으로 살아가면서 스스로의 초라함을 마주하는 일은 계속 늘어갈 것이다. 그것이든 외면이든, 내면이든. 더 오래 견뎌야한다면 대로 응시하는 법을 익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린 날의 꿈틀거리던 연가시 같은 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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