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프로그램 출연자들은 모두 어떻게든 편집되지 않기 위해 저마다의 캐릭터를 남기려고 애쓴다.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강 건너 불구경일 수도 있지만, 당신 알고있는가? 사실 우리도 지금 예능을 찍는 중이다.
이야기를 주도하며 주목받는 사람은 한 명씩 꼭 있다. 재치 있고 유머 있는 사람이 대체로 인기가 많지만 때로는 그저 멋진 외모를 가진 사람에게 이목이 집중되기도 한다. 존재감 없이 쉽게 잊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딱 한 번의 만남으로도 뇌리에 박힐 만큼 강한 인상을 주는 사람도 있다.
모두 저마다 가진 매력을 살려 좌중의 앞에 내어 보이고, 모든 장면들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서 새롭게 편집된다. 아무래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사람들이 출연율이 좀 더 높겠지.
그러면, 나는?
나 설마 통편집 되는 거 아니지?
대학 생활 중 학과 전통으로 대면식이 있다. 군기를 잡는 건 아니고 친목 도모를 위한 자리다. 대략적인 방식은 다음과 같다. 신입생이 입학한 3월 중에 주점 하나를 통째로 빌린다. 선배들이 각자 몇 명식 조를 이루어 테이블마다 앉아있고, 신입생 또한 몇 명으로 조를 짠 뒤 모든 테이블을 로테이션한다. 각 테이블마다 착석하여 5분 정도 대화가 이루어지고 다른 테이블로 자리를 옮긴다. 시계 방향이든 반시계 방향이든 선배와 후배 조들이 전부 한 번씩 만날 때까지 후배조들이 테이블을 돈다. 단체생활이 기본이 되는 학과이다 보니 몇 년간 서로 볼 사람들끼리 인사하고 안면도 익히는 자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각자의 소개는 몇 가지 키워드로 간략히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친구는 삼성 라이온즈의 광팬이라거나, 어떤 친구는 아이돌 멤버 ○○를 덕질하느라 티켓팅의 고수라거나, 우리 학과에서 제일 나이 어린 막내지만 멘탈갑이라거나.
자기 입으로 저런 소개를 한 건 아니고 대화중에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의 발언으로 드러나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서로에 대한 인식이 이곳에서 밝혀지고 있다는 게 흥미롭기도 했다. 그러다 내 차례가 왔다. 사실 난 그때 조금 기대를 했다. 1년간 친하게 지낸 동기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일까?
"이 언니는 공부를 잘해요!"
끝인가? 진짜 그게 다야? 여기 입학한 사람들 중에 공부 못하던 사람은 솔직히 별로 없을 텐데, 나를 설명하는 말로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이 이거라니. 나는 내가 순식간에 고루하고 따분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슬프게도 학년 말이 갈수록 동기들 간에 정신 차리고 공부에 매진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며 나는 등수가 약간씩 밀려났고, 그렇게 얼마 없어서 귀중한 나의 개성조차 잃어갔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중학생 때는 극히 일부 친구들이 부르던 별명 아닌 별명이 하나 있긴 했었다. '암울 소녀'라고, 지금 보면 뭐 이리 유치한 말이 다 있나 싶은데 정작 나는 그다지 싫어하진 않았다. 혹시 내가 그때 중2병이 있었던가? 아무튼 내가 얌전한 성격에 수줍음도 조금 있었고 약간 울상이기도 해서(?) 일본 만화를 좋아하던 친구가 그렇게 이미지화했다. 그러다 미술 수업에서 자기 모습을 캐릭터로 그려보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그 친구가 주입해 준 이미지를 바탕으로 작품을 하나 완성했고, 그림을 잘 그려서인지 아니면 나를 잘 표현 해서인지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꽤나 호평을 받았다. 덤으로 암울 소녀라는 별명을 처음 붙여준 친구는 크게 흡족해했다.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그날 집에 돌아가서 엄마에게 그 그림을 자랑했다. 나는 엄마도 재미있어 할 거라고 기대했는데, 엄마는 "암울한 게 너는 뭐가 좋다고 그러냐"면서 한마디 툭 던질 뿐이었다. 맞는 말이기야 하지만... 나는 그때 많이 속상했다.
어릴 적에는 모호한 감정을 정확히 이유를 들어 설명하지 못했지만, 어른이 되면서 나는 영문을 모르던 서글픔의 정체를 알았다. 캐릭터의 부재. 어울려 다니던 친구들도 있었고, 짝꿍처럼 지내는 친구도 있었는데도 문득 소외감이 들던 것도 아마 그 때문이었겠지. 나를 인식하는 어떤 뚜렷한 색깔이 없다는 사실이 나를 있으나 마나 한 투명한 존재로 규정짓는 것 같았다.
지금 다시 과거로 돌아가면 엄마에게 큰 소리로 말할 수 있다. 암울하단 게 좋단 게 아니라, 아무 특징 없이 무색무취인 게 싫은 거라고. 연예인들 봐, 무관심이랑 존재감 없는 게 제일 싫다고 하잖아! 뭐... 연예인 할 거냐고? 그건 아닌데, 내가 살다 보니까 놀랍게도 우리도 카메라 없는 예능을 찍고 있더라고. 24시간 내내!
무한도전에서 정형돈이 '못 웃기는 개그맨'콘셉트인 것으로 엄청나게 스트레스받고 있던 게 어떤 건지 잘 알 것 같다. 방송인도 아니고 관련 업종도 아닌 내가 이런 고민 이런 캐릭터 타령을 하고 있는 게 스스로도 너무 어처구니없지만, 역시 세상 살면서 나를 내보일 색깔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없다.
공부를 잘한다느니 이런 거 말고 진짜 나를 말할 수 있는 그런 개성이 가지고 싶었다. 그런 개성을 꼭 남의 입으로 듣고 싶었다. 조용하다는 말은 그만 듣고 싶었다. 초등학생 땐 장난기 많은 남자애들이 나보고 말 좀 해보란 말을 어찌나 많이 하던지(글은 길다, 어쩔래!).
어느 날 친구들과 점심을 함께 하던 중에 한 친구가 다른 친구를 향해 "너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다. 나는 그 말이 그렇게나 죽도록 탐이 났다. 미치도록 탐이 나서 그 말이 나를 향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 슬펐다. 너무나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지나가던 말이라 정작 그 말을 한 사람도 들은 당사자도 전혀 기억을 못 할지도 모르는데, 그 옆에 함께 있던 내가 내 것이 아닌 그 말을 혼자서 간직하고 있다. 그 애가 필요 없다고 한다면 냉큼 내가 가지겠다고 할 수도 있다.
내가 인간으로서 어떤 매력이 없는가 하는 고민은 지금도 여전하지만, 나도 이전과는 많이 변했다. 나를 설명할 수 있는 표현들을 내 힘으로 채워가는 중이다. 그 고민은 어찌 보면 내가 자초했다. 각자의 색깔이란 건 스스로 세상과 부딪혀가면서, 그렇게 자신을 알아가며 만든다는 걸 이제 잘 안다. 그저 돌이켜봤을 때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조금 더 치열하지 못했던 내가 너무나 아쉬울 뿐이다.
오늘도 예능 한 편 찍고 왔다. 장르는 사회인 예능이겠지. 최대한 프로다운 모습 보여주려고 했고, 넉살 좋게 웃었고, 또 분위기 너무 삭막하지 않게 농담 한두 마디 던지기. 바쁠 때는 목소리가 살짝 높아지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괜찮겠지? 쓸만한 장면은 좀 건졌으려나. 나 오늘 꽤 괜찮았지. 내 이름 석 자에 뒤따라오는 연관검색어를 내심 신경 쓰면서 퇴근한다. 요즘 내가 미는 캐릭터는 일잘러인데.
그러고 보니 이제 가족 예능 찍으러 갈 시간이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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