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량사>
자는 길고 저울은 튼튼합니다
아마도
자는 해발과 수심을 재던 물건이었을 겁니다
저울은 정육점에서 쓰던 물건 같습니다
무엇이든 잴 수 있습니다
악취를 풍기는 구덩이, 머뭇거림이 뛰어내리지 못하는 난간, 분노가 가시지 않은 돌, 톱질의 기억이 앉아 있는 의자……
자의 일은 높이를 재는 것이고
무게를 달아야 저울입니다
불안이 사라져도 키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예감이 악몽으로 바뀌어도 중량은 그대로입니다
고통은 무엇을 더하거나 덜어내지 못합니다
나는 무감합니다
높이가 없는 것을 상상하지 않습니다
무게가 없는 것을 수긍하지 못합니다
무엇이든
자 옆에 세웁니다 저울에 올려놓습니다
측량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높이나 무게가 있을지 모르지만
사소한 오차일 뿐입니다
-유병록,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중에서
추천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