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 앞에서 반성할 일이 있다
류시화
슬픔이 문을 두드릴 때 너무 깊이 숨었다
기쁨마저 찾을 수 없을 만큼
절망이 뒤쫓아올 때는 더 멀리 달아났다
희망마저 따라오기를 포기할 만큼
불행을 이겨 낸 후에는 혹시나
행복마저 두려워했다
내가 욕망을 따라다니면서 언제나
욕망이 나를 따라다닌다고 한탄했다
둘만의 사랑의 둥지를 만드느라
너무 많은 꽃을 꺾었다
별을 세느라 어둠을 외면했다
어둠 없이는 별들도 빛날 수 없는 것인데도
주목받는 날들에 찬사를 보내느라
주목받지 못하는 순간들에 주목하지 않았다
내가 아픔을 돌보았다고 생각했는데
아픔이 나를 돌본 것이었다
아침을 맞이한 모든 것은, 설령 고뇌일지라도
어둠을 통과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었다
모란 앞에서 겹겹이
반성할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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