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장면을 믿는다. 사람보다 오래 살고, 말보다 정확하며, 기억보다 성실하게 남는 장면을.
하루의 빛, 공기, 소리. 그리고 작은 선택, 말 한마디, 스쳐 가는 시선까지. 그것들이 겹겹이 쌓여야 완성되는 '장면'. 나는 오늘도 작은 장면들을 조심스레 접어 마음 한쪽에 넣는다. 이 장면들은 미래의 내가 받게 될 편지 같아서 섣불리 흘려보내기 어렵다.
어느 카페의 테라스. 누군가는 급히 뛰어가고 누군가는 옆 사람과 함께 웃는다. 그리고 그들을 보는 내 시간은 멈춘다. 잔 위로 비치는 나뭇잎, 냅킨에 떨어진 커피 한 방울, 구겨진 영수증, 죽어 있는 것들이 숨 쉬기 시작한다. 이것이 순간의 힘. 이것이 바로 나를 위한 영화.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속도로 움직이고, 나는 그들의 사연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과 무관하게 내가 보는 이 작은 풍경은, 분명 어느 날 갑자기 다시 떠오를 것이다. '그래, 평온한 날이 있었지. 그런 공기가 내 삶에 있었지.' 하고.
지금의 숨결을, 지금의 온도를, 지금의 떨림을 시간이라는 우체통에 넣어 언젠가의 나에게 도착하게 하는 것. 그로써 나 스스로를 다독이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낭만이 전달되는 방식이 아닐까.
낭만적 장면을 만드는 데는 몇 가지 색이 필요할까? 바둑판 위처럼 흑백이면 충분할까. 아니면 총천연색이 필요할까. 아니, 한 가지로 충분하려나. 그 위에 어떤 향을 덧입혀야 할까. 커피? 커피도 아니면 벽돌 사이에 솟은 풀 냄새. 그것도 아니면 콘크리트 사이에서 나는 흙냄새라거나. 무엇이든 좋을 것이다.
지하철 선로 위로 번지는 햇살, 창문을 두드리는 미세한 먼지 입자, 책장 사이에서 튀어나온 은은한 종이 냄새.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내 안에서는 낭만을 담은 장면이 된다.
그럴 때면 생각한다. 나는 이 장면의 조연이 아니다. 주연도 아니다. 이 장면들의 연출자다. 낭만의 연출자. 삶의 사소한 떨림을 캐치하고 이어 붙이는 사람. 나 자신에게 보여줄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 삶의 장면을 스스로 찍고, 스스로 편집하고, 스스로 간직하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라고.
어느 저녁, 골목길을 걷다가 멈춰 선다. 가로등 아래에 떨어진 빛이 젖은 아스팔트 위에서 부드럽게 흔들린다. 흙냄새와 오래된 벽돌 냄새가 빗물에 섞여 은근하게 피어올랐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을 그 풍경이, 내게는 무엇보다 절대적인 장면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직감했다. 공기의 온도, 발끝의 무게, 숨을 들이마실 때의 차가운 떨림까지 모두 나중에 돌아올 것이라는 걸. 어떤 날에는 날카롭게, 어떤 날에는 아주 부드럽게 내게 찾아올 거라는 걸.
낭만이란 그렇게, 현재의 감각을 미래의 감정으로 배달하는 일일 테니까. 그래서 항상 많은 것을 관찰하려 노력하곤 한다. 다른 누구보다 조용히, 오래, 천천히. 내 마음을 스치는 장면들이 마치 한 장면씩 영혼의 뒷면에 새겨지는 것을 느낄 수 있기에.
지하철 문이 닫히기 직전, 내 앞에 선 사람이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 평범한 숨소리가 이상하리만큼 고단하게 느껴졌다. 고개 숙인 눈빛에선 묘한 떨림이 스쳤다. 아무 관계도 없는 타인의 순간. 완전한 타인의 감각이 내 마음 어딘가에 있는 작은 문을 두드렸다.
물론 그 숨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내 마음은 묘하게 흔들렸다. 그 사람의 작은 떨림이 나의 오래된 취약함과 맞닿은 것 같았기 때문에. 훗날, 피로에 찌든 어느 날, 길 위에서 혼자 멈춰 설 때에 문득 이 장면이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이런 공기 속에서 누군가의 한숨을 느낀 적이 있었지. 그는 무엇이 그렇게 고단했을까. 지금의 나는 다른 이의 눈에, 그때의 그보다 더 피곤해 보이려나.'
그러면 아마 조금은 덜 외로워질 것이다. 장면은 이렇게 나를 구한다. 아무도 모르게, 아주 오랫동안.
장면은 그렇게 시간을 건너 하나의 메모가 되고, 메모는 내 손에 닿을 편지가 된다. 편지를 받는 순간마다 이해하게 될 것이다. 장면 하나가 나를 지키고, 낭만 하나가 나를 이어주고, 작은 순간 하나가 영화의 어떤 장면보다 큰 울림을 만들었다는 것을.
그렇다면 '언젠가 영화를 만들겠다'는 말은 막연한 꿈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서약일 수도 있지 않을까.
단순한 계획이 아닌 약속. 오늘의 장면들을 잃지 않겠다는 약속, 미래의 나를 외롭게 두지 않겠다는 약속.
누구를 위한 영화도 아니고, 관객을 의식하지 않는 영화. 오직 내 삶의 장면을 미래의 나에게 전달하기 위한 영화를 만들겠다는 서약이자 약속.
장면 하나를 건네주는 방식. 그것이 낭만이다. 빛이 스치는 각도, 커피 위에서 잠깐 일렁인 거품, 누군가 발끝으로 그린 작은 원. 이런 것들은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미래로 데려다준다. 미래의 나는 언젠가 이 모든 장면들을 다시 만날 것이다.
나는 그 장면들을 필름처럼 이어 붙인다. 화면 속에서는 스쳐 지나갈 작은 순간들, 웃음의 여운, 발자국 소리,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기억한다. 언젠가 이 필름을 돌릴 때, 스크린 밖에 있는 관객이 아니라, 나 자신이 감동할 장면들이기에.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조금 지친 모습일지도, 조금 더 단단한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한 건 하나다. 나는 그때 그 장면들을 다시 떠올리게 될 것이고, 그들은 조용히 속삭일 것이다.
"모든 순간이 네 삶이었어."
"이 빛 속에서 너는 버티며 숨 쉬고 있었어."
"이런 공기를 들이마시며 스스로를 잃지 않았어."
언젠가 나는 그 장면들을 다시 틀어볼 것이다. 여운이 남는 영화를 다시 꺼내보듯이.
그렇기에 나는 매일 장면을 모은다. 내일의 내가 길을 잃지 않도록, 미래의 내가 오늘의 나를 그리워할 수 있도록, 언젠가의 내가 다시 숨을 고를 힘을 얻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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