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꿈
사랑하는 꿈
2025.12.01
르그·⌛15분

아빠는 날이 갈수록 자신의 모습을 잃어갔다. 안 그래도 말수가 적으셨던 분이 이내 말을 걸어도 대답조차 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고, 일터에도 나가지 않으셨으며, 급기야 방문을 걸어 잠그고 방에서 하루 종일 나오지 않게 되셨다. 내가 고등학생 때쯤의 일이다. 나는 방문을 열면 아빠가 죽어 있을까 무서워서 차마 문을 두드려보지도 못했다. 당시에는 우울증이라는 병이 잘 알려지지도 않았을뿐더러 정신질환에 대한 인식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도 그것이 병원 치료가 필요한 병이라고 인지하지 못했다. 아마 당신 자신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가족들이 나름 행복했던 시절의 앨범 속 사진들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아빠의 젊은 시절, 폼나게 옷을 차려입고 친구들과 활짝 웃으며 찍은 사진이 유독 내 마음을 움직였다. 아빠는 세상 빛을 혼자 다 머금은 듯한 말간 얼굴로 친구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기타를 치며 길을 걷고, 사나이 같은 포즈를 취하며 인상을 쓰고, 사색에 잠긴 시인처럼 엷은 미소를 띤 채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보지 못한 아빠의 얼굴들. 그건 분명 눈부신 청춘을 담은 모습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아빠의 아름다움을 다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곳엔 아빠가 잃어버린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아빠가 다시 그 빛을 찾아 주기를.

대화가 단절된 우리 가족은 각자 결핍을 채울 방법들을 찾았다. 당시 오빠는 일렉기타 위로 손가락을 튕기며 전류처럼 흐르는 음들에 자신을 내맡겼다. 나는 문틈을 뚫고 나오는 그 기타 소리를 좋아했다. 내가 방에서 주로 하던 일은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는 것이었으므로 방해가 된 적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그 소리는 이상하게 힘이 되었다. 시끄러운 메탈음악이 적막으로 가득한 차디찬 집에 뜨겁게 울릴 때 나는 가슴이 뛰었다. 오빠는 기타를 치고 또 쳤다. 아마도 오빠에게 그 시간은 잠시라도 내면의 바다에 온전히 뛰어들어 자유롭게 헤엄치는 유일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의 혼란과 꿈이 뒤섞인 음악 소리가 얼마나 빛나는 것이었는지 기억한다. 그리고 어둠에서 빛을 찾아 유영하듯 이러한 아름다움을 지독하게 갈망하게 되었다.

무라카미 류의 소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류 넌 플루트를 불어야 해.
내 속마음을 진짜 얘기해 볼까?
언젠가 내 생일날 네가 플루트를 불어주었지.
그래, 정말 기뻤어. 가슴이 찌릿하게 울리더군.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기분이었지. 그때 난 생각했어.
넌 얼마나 행복한 녀석인가 하고 말이야. 네가 부러워.
난 아무것도 할 줄 모르거든. 나는 쓰레기 같은 존재에 불과해.
그래서 무엇인가 채우려고 헤로인을 하지.
하지만 매번 허전해.
그 허전함은 레이꼬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닌 것 같아.
그것은 네가 불어준 플루트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 “

오래 전 읽은 소설이라서 기억은 흐릿하지만 저 플루트 소리에 대한 대사만큼은 가슴 깊이 새겨져 살아가며 한 번씩 불쑥 떠오르곤 했었다. 나는 나의 세계에서도 류의 플루트 소리를 기다렸다. 내가 찾아 헤매던 그 선율은 어느새 나의 깊은 꿈이 되었다. 어린 나에게 사는 일은 버거웠지만 그럴수록 꿈은 내 안에서 더 밝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우연히 경험하게 된 연극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허구 속에서도 순간의 진실은 생명력을 갖고 물고기처럼 튀어 올랐다. 그것을 발견하고 낚아채는 순간이 좋았다. 그 물고기를 요리하고 씹고 뜯고 맛보는 감각은 슬픔으로 굳어져 있던 내 삶을 생생한 감각으로 되돌려 주었다. 어차피 거짓이니 무대에서 펼쳐지는 모든 감정은 즐겨도 되는 것이었다. 어쩌면 아빠가 잃어버린, 오빠가 마주했던, 나를 덮쳐왔던 모든 감정을 열렬히 겪어내고야 마는 그런 세계를 마침내 찾은 것이다. 나는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

시간이 허물어지고 경계가 사라지는 순간들. 무대에서의 해방감은 삶을 더 다채롭게 만들어주었고, 삶의 통증을 경감해주는 묘약 같았다. 그러나 너무 의지한 탓이었을까. 이 묘약을 얻지 못할 때면 나는 아파졌다. 아빠처럼 방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내 꿈은 반은 이루어졌지만 반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배우가 되긴 했지만 내가 머무르고 싶던 세계는 필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언젠가 아빠의 사진 속 모습이 이미 사라진 과거였음을 받아들여야 했던 것처럼, 홀연히 나타나 은은하게 사라지는, 류가 불어준 플루트 소리 같은 것은 순간 탄생되었다가 그 모양도 없이 사라져갔다. 신기루처럼, 꿈처럼. 그래서 아름다웠던 것일까?

나는 가족들이 웃고 있는 사진들 속도 아니고 문틈 사이를 뚫고 전류처럼 나에게 닿던 오빠의 기타 소리도 아니고 온갖 사건이 다 펼쳐져도 안전한 무대 위도 아닌, 어질러진 나의 집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작전을 세워본다.

  1. 일상을 세밀하게 바라보기
  2. 있는 그대로 놓아두기
  3.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바라보고 배우처럼 겪어내기
  4. 내가 나로 사는 일을 허락하기

돌아본다. 둘러본다. 관찰한다. 경험한다.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고민하기. 하고 싶은 말을 머금어보기. 굳이 편지를 쓰고 부치기. 무작정 온 마음을 내던지기. 그로 인해 좌절하기. 팔리지 않아도 그려지는 그림들. 비바람이 부는 날씨에도 여행을 떠나기. 죽음을 꿈꾸기. 지면에 닿자마자 녹아버리는 눈송이. 계절마다 피고 지는 식물들. 기도. 나뭇가지를 모으기. 강아지와 나누는 아침 인사. 술에 취해 마주 본 얼굴. 넘어져도 일어나기. 생일 축하 노래. 다 같이 부르는 노래. 이 모든 일이 다 사라지고 없음을 발견하기.

사실은 삶 자체가 묘약은 아닐까? 경험만이 전부인 꿈과 같은 시간.

극작가 셰익스피어는 삶은 무대이고 모든 사람은 배우라 했다. 여기서부터 나의 이야기를 다시 써본다. ‘아빠’ 역할의 배우가 어둠을 품는 용기를 냈기에 그에 영향받은 자녀 역할의 배우 ‘나’가 삶을 좀 더 깊게 맛보게 된 기회를 얻었다. 후에 부모님은 이혼하셨고 이후 ‘아빠’와는 떨어져 살게 되었지만, 다행히 ‘아빠’는 오랜 시간이 걸려 회복되셨다. 둘은 여전히 대화가 어색하긴 하지만 이제 '나'의 ‘아빠’는 전화도 잘 받고 카톡으로 뜬금없는 명언을 보내기도 한다. ‘나’는 가끔 궁금해한다. ‘아빠’는 어떤 순간을 붙잡고 다시 햇빛으로 걸어 나오셨을지. 그리고 말하고 싶다. 당신을 사랑해서 아팠으나 그 사랑이 나 자신을 품었으니, 내게 더 이상 미안해하지 말라고.

그리고 이 방황의 여정들 속에서도 묵묵히 나와 오빠를 지켜주신, 산과 바다, 꽃과 하늘 속에서 숨겨진 은총을 찾아다니는 일을 멈추지 않으셨던 엄마. ‘엄마’는 봐주는 이 하나 없어도 삶의 쓴맛 신맛 단맛을 당신만의 방식으로 요리하고 있었다. 어떤 요리가 나올지 당신 자신도 모르셨겠지만, 그저 충실하게 웃음을 잃지 않으며, '나'와 '오빠'도 맛있게 먹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시 어질러진 집. 어느새 이 모양 그대로도 괜찮다는 생각이 스친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부서진 마음의 조각들은 유리 같아서 더 반짝반짝 빛을 낼 수 있다. 나는 '나'로 살아가는 이 이야기와 사랑에 빠지기를, 어쩌면 그 사랑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느낀다. 겪고 싶지 않았던 수많은 일들이 있어야지만 쓰여질 수 있는 이야기. 리허설은 없지만 단 한 번뿐인 공연. 이 곳에서 가족들과 만났다는 것 만으로도 이 서사를 사랑할 이유가 충분하다.

그리하여 사는 일을 정말로 사랑해 내는, 긴 꿈과도 같을, 나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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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그
안녕하세요. 르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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