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타키나발루
코타키나발루
2025.11.08
온기·⌛14분

올해 여름, 창문을 세차게 두들기는 폭우에 잠이 깨는 아침이 잦다. 이상기후 때문에 동남아처럼 스콜이 내리는 탓이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비 내리는 날의 낭만도 잊었다. 잔잔한 빗소리를 들으며 창밖 풍경을 내다보는 일이 낭만적이지, 이런 폭우 속에선 낭만은커녕 신발이 젖을 현실적인 걱정이 앞선다.

폭우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하나 있다. 몇 년 전 친구와 함께한 코타키나발루의 섬 투어. 비, 바다, 여행이라니. 시작부터 너무 뻔한가? 남의 여행 이야기 따위 재미없겠지. 하지만 부디 조금만 참고 읽어 주기 바란다. ​

코타키나발루 여행에서는 멋진 노을을 보는 것이 필수다. 우리도 섬으로 들어가 신나게 액티비티를 하고, 노을이 지는 해변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맛있는 저녁으로 하루를 마무리할 계획이었다. 날도 맑고 몸 상태도 좋았다. 아침 일찍 선착장에 도착해서 순조롭게 보트에 올랐다. 섬에 가까워질수록 보트의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 바람에 물보라가 크게 일어 정면으로 물벼락을 맞았다.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니 보트를 운전하던 직원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꽤 영화 같은 장면이었다. ​

보트는 여전히 빠르게 섬으로 돌진하고, 물방울은 내 얼굴로 계속 돌진하고. 그런데 아무리 보트 속도를 감안해도 얼굴을 때리는 물방울 세기가 점점 거세지는 것이... 어째 이상하다?

섬에 입장하자마자 하늘에서 굵은 물줄기가 벼락처럼 땅바닥으로 거세게 내리꽂혔다. 스콜이었다. 보트에서 내린 모든 사람들이 오두막으로 달렸다. 섬에 들어오자마자 발이 묶였다. 이런 날씨라면 안전 문제 때문에 액티비티를 할 수 없다. 아니, 액티비티는 무슨. 해변 산책도 못 한다. 작은 섬에는 비를 피할 오두막 한 채 말고는 다른 시설이 없었다. 한마디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는 얘기다. 차라리 섬에 들어오기 전에 비가 왔다면 섬 투어를 포기하고 다른 계획을 세웠겠지만 하필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처음엔 여행 일정이 망가졌다는 생각뿐이었다. 비가 그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내내 스콜 구경만 하다가 섬을 퇴장할 수도 있었다. 불안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투어 종료시간에 맞추어 보트를 타고 섬을 나갈 수만 있다면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 이대로 비가 그치지 않고 내도록 이어지면 어쩌지? 보트를 띄울 수가 없으니 섬을 떠날 수도 없겠지. 내일도 계속 비가 이어지면? 내일도 섬을 못 나가겠지. 출국 날까지 섬에 고립되면? 당장 다음 주가 개강인데, 혹시 날씨가 잘못되어서 방학의 마지막 날까지 비행기를 못 타면? 걱정의 종착지는 학교에 무단결석하는 내 모습이었다.

말해두지만 나는 심각한 불안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보이는 건 맹렬한 빗줄기에 들리는 건 찢어지는 천둥소리였다. 그 상황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걱정하기'였다. 기세를 보니 비가 금방 그칠 것 같지 않았다. 한국에선 스콜이란 단어도 생소할 때였다. 나는 스콜을 그 섬에서 처음 만났기 때문에 더 낯설었다.

힘든 순간은 둘이서 함께 이겨내야 하는 법. 불안감을 이겨내고자 내 옆에 앉아 있던 친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내 기대와는 달리 마주한 것은 얄궂게도 스콜이 아니라 잔잔한 빗소리 asmr을 듣는 듯한 평온한 표정이었다. 혹시 오두막 밖의 저 무서운 소리 나한테만 들리는 거 아니지? 둥둥거리는 음향이 울려 퍼지는 노래방 소파 한가운데서 숙면을 취하던 아빠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

나는 물러서지 않고 머릿속에서 한껏 부풀어 오른 나의 걱정거리들을 토로하며 공감을 시도했다. 나 다음 주에 학교 못 가면 어떡하지. 머릿속에서 이미 몇 단계의 숙성을 거친 후라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맥락도 없고 어처구니없는 걱정으로 들렸다. 스콜이니까 곧 그칠 거야. 친구는 내 이상한 걱정을 비웃지 않고 담담하게 응답했다. '불안감 공유하기'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나니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그렇지. 넘어져서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조차 부모가 덤덤하게 반응하면 별일 아닌가 싶어 금방 눈물을 그치기 마련이다. 대단한 재앙이 벌어진 것도 아닌데 내 불안감으로 여행의 분위기를 망쳐서는 안 되었다. 친구가 스콜 앞에서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전부 알 수 없어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상황을 수용하려 시도했을 지도 모른다. 내 불안감만 앞세운 것 같아 괜히 미안했다. 나는 그제야 마음을 진정하고 오두막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

그리 작지만은 않은 공간이었지만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 북새통이었었다. 이 사람들 다 액티비티를 한껏 기대하고 왔을 텐데, 못 놀아서 아쉽지는 않을까?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들은 실의에 빠져있지 않았다. 스노클링 장비들을 뒤로 한 채 일행들과 웃고 떠드느라 시끌시끌했다. 모두들 스콜이 내리는 한복판이라는 걸 잊은 듯했다.

나도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우렁찬 빗소리도 듣고, 오두막에 터를 잡은 고양이 사진도 찍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스콜에 대해 생각하기'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대략 한 시간 지났을까. 비가 완전히 그치지는 않았지만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동안 줄지은 내 걱정들이 무색할 정도였다. 빗방울이 약해진 틈을 타 재빠르게 물놀이를 즐기려 뛰쳐나가는 대단한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도 뒤따라 물놀이를 했던가? 사실 그건 기억이 잘 안 난다. 기억나는 건 오두막으로부터 해방되자마자 끓여 먹었던 진라면이 미치도록 맛있었다는 것이다.

얼마 전 친구를 만나서 밥을 먹었다. 짭짤한 고등어를 얹은 소면 맛이 좋았다. 따뜻한 국물에서 면을 건져 먹다 보니 자연스레 그때가 생각났다. ​

"우리 코타키나발루에서 라면 먹던 거 기억나?"
"진라면 먹었잖아, 완전 맛있었는데!" ​

주저 없이 대답이 돌아왔다. 비 때문에 서운한 점도 있었지만 라면을 먹고 나니 오히려 좋았다면서. 친구는 사진첩까지 뒤져 당시의 영상과 사진들을 꺼내 보였다. 묘하게 뿌연 화질로 그간 쌓인 세월을 실감했다. 사진을 보면 당시의 감상이 생생하게 떠오를 줄 알았는데, 낯설고 모호했다. 우리와 똑같은 얼굴을 한 두 사람이, 내 기억 속에 없던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

"아직 그때 먹은 라면이 인생 라면이야. 솔직히 지금 먹는 소면도 이긴다." ​

조금 과장을 섞어 이야기했지만, 내게 남은 건 '라면이 맛있었다'는 사실의 기억뿐 구체적인 맛의 기억은 없다. 하지만 그 덕분에 내 인생의 유일무이한 라면이라는 자리에서 물러날 일은 없어졌다.

낭만이 드리우는 한 장의 가림막. 주어진 현실을 바꾸지는 않는다. 다만 어디를 가리느냐에 따라 같은 상황은 전혀 다른 기억이 된다. 때로는 잊기 아쉬운 장면조차 가림막에 파묻히기도 하지만, 적당한 망각은 상상의 여지를 남겨주기도 하는 법이다. 어쨌든 중요한 건 우리가 코타키나발루를 떠올릴 때, 스콜 속에서의 지친 감정이 화두에 오르는 일은 전혀 없었다는 게 아닐까.

어떤가, 혹시 이 평범하고 따분한 이야기가 '재미없다는 것'을 잊어버리지는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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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기
안녕하세요. 온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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