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의 이면에는 분노가
중독의 이면에는 분노가
2025.12.20
교오·⌛15분

"인간은 어리석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낭만 없인 하루도 살 수 없었다. 낭만. 단어를 입 안에서 굴려본다. 왼쪽 볼엔 고백이, 오른쪽 볼에는 비웃음이 굴러다닌다. 금단 증상. 낭만 없는 하루는 건조했다. 반복되는 일정, 피곤한 사람들, 불필요한 대화, 메마른 공기. 나는 매일 쌓여가는 먼지를 털어내려 낭만을 불러냈다.
새벽 두 시. 반쯤 남은 술잔 뒤로 비치는 조명, 오래된 노래 가사에 깃든 감정, 괜히 뒤져보는 사진첩. 이것들에 낭만이란 이름표를 붙일까, 잠깐 생각한다. 생각하다가 그만둔다. 남는 건 언제나 짧은 위안뿐. 아침이 되면 조명은 꺼지고 남은 술잔은 냄새나는 쓰레기로 바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반복해서 그 위안에 손을 뻗었다. 그만큼 나는 낭만에 목을 매고. 아니, 사실은 목을 내어주고 있었다.

낭만을 좇을수록, 달콤해야 할 순간마다 씁쓸한 뒷맛이 남았다. 웃음 뒤의 서늘함. 햇살 뒤의 그림자. 쌓이는 건 낭만이 아니라, 내 안에서 조용히 자라나는 분노였다. 낭만을 향한 추구.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면 그게 순수하지 않은 추구였다는 점이다. 허울뿐인 낭만을 추구하는 동안, 시간은 나를 살리는 동시에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낭만을 찾는 순간마다 느껴지는 알 수 없는 불안. 그 불안의 신호를, 이미 몸은 감지하고 있었다. 어두운 골목에서 불쑥 켜지는 가로등을 발견했을 때처럼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순간. 나는 그 불안을 상처라 여기고, 낭만을 약이라 불렀다. 그래서 불안 위에 낭만을 치덕치덕 발라 덮어버렸다.

중독은 뇌의 보상 체계가 어긋난 것이라고 한다. 끊임없이 자극을 찾지만, 만족감은 줄고 분노만 남은 상태. 낭만은 자극적인 것이 아닐 텐데, 왜 내 일상에는 분노가 달라붙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부드럽고 감미로운 것, 그것이 낭만이었잖아.'
'빛나는 울림, 그게 낭만이었잖아.'

억울했다. 감미로운 음악도, 맛있는 음식도, 적당한 바람도, 가벼운 이야깃거리도, 기분 좋을 만큼의 취기도 있는데. 난 왜 이렇게 허무한 건데. 난 왜 행복하지 않은 건데. 왜 자꾸 화가 나는 건데! 이 망할 놈의 낭만을 부숴버리고 싶었다.
이건 분명 낭만이 변질된 거다. 무심코 건드리면 베일 것 같고, 가까이 붙들면 불에 데고 말 것 같은 통증. 왜 낭만이 통증이 된 거지. 치덕치덕 바르면 상처를 치유해주던 낭만이, 이제는 왜 독이 된 거지. 문득 분노가 고개를 든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지. 불안을 잘 안고 살아가야 좋은 인간이 된다지. 불안을 다스리려고 낭만을 선택한 게 그렇게 큰 잘못인가? 내가 누구한테 상처를 줬어, 사람을 쳤어, 돈을 빼앗았어? 내가 뭘 잘못했냐고 도대체...

"선생님, 낭만에 중독되신 것 같네요. 그러니까 정확히는 낭만을 좇는 행위에 중독되신 것 같네요. 낭만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증상 중 하나죠."

머릿속 주치의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그 입 좀 다물어 주실래요. 그러니까 당신은 낭만 닥터고, 나는 낭만 중독자다 이거 아니에요. 알겠으니까 그만 제 머릿속에서 나가 주실래요? 그 주둥아리 한 대 치고 싶으니까. 아, 그만하시라고요. 제가 원하는 건 '낭만 중독'이 아니라 '낭만 충족'이에요.

쾌락은 일시적이다. 일시적인 것은 공허를 불러오고, 공허는 불안을 증폭시킨다. 그래서 더 강렬한 것을 찾아 헤매게 된다. 알겠어요.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도파민 문제라는 거죠? 제가 그걸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제대로 인식해야 된다고요? 아, 당신이 뭔데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예요. 나도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다고요. 당장 그만하세요. 머릿속에서 완전히 내쫓기 전에.

좀 조용해졌다. 내가 외면했던 것들을 보려다 눈을 질끈 감는다. 타다 못해 녹아버릴 듯한 목마름. '진짜 낭만을 찾아야 해.' 중얼거리고는 부지런히 주변을 살핀다. 그러나 눈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다. 눈에 들어온 게 없는데 눈물이 나려고 한다.
이 상황이 제일 역겹다. 뭘 잘했다고 울어. 뭘 잃었다고 울어. 부족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왜 우냐고. 아니, 아무것도 없어서 우는 건가 싶기도 하다. 빈 화면을 보며 새로고침을 누르듯 빈 마음을 조급하게 두드린다. 낭만 같은, 뭔가 반짝이는 게 튀어나오라고. 그런데 아무것도 튀어나오지 않는다. 동전을 먹어버린 자판기처럼 고장 난 낭만 기계는 미동이 없다.

"선생님, 일단 진정하시고요. 지금 느끼는 감정이 분노라는 건 아시겠죠? 그런데 분노는 2차 감정이고, 그 밑에 1차 감정이 있어요."

제길, 또 시작이야... 아, 예에예에. 1차 감정이요? 슬픔, 두려움, 외로움, 뭐 그런 거요? 네네, 있겠죠. 그런데 그런 거 없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리고 그걸 꺼내면 내가 너무 초라해지잖아요. 그래서 잘 덮어둔 거라고요!

"선생님, 말씀드리기 안타깝지만... 현재로서는 덮개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덮개로 쓰인 게 바로 낭만이고요."

하! 낭만이 작동을 안 한다니 뭔 소리야.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온다. 게다가 낭만이 덮개라니?! 아니, 안타까우면 말을 하지 마시라고요.
사실 그 말 한마디가 정확해서 더 화가 난다. 덮개라니, 나는 낭만을 그런 싸구려로 만들고 싶지 않았는데... 상처가 올라오면 낭만을 바르고, 공허가 올라와도 낭만을 바르고, 무기력이 올라올 때도 낭만을 치덕치덕 발랐다. 그러다 보니 낭만을 바르는 행위는 습관이 됐다. 나는 낭만에게 이것저것 요구하곤 했다.

'나를 살려줘.'
'나를 구해줘.'
'나를 행복하게 해줘.'

물론 그런 요구를 낭만이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감당하지 못하는 것들은 무너진다. 무너진 낭만의 잔해는 빠르게 분노로 바뀌어 버렸다.

'또 실패했어.'
'또 안 됐어.'
'나는 또 안 행복해.'

그렇게 실패의 감각은 중독의 불을 지피는 연료가 되었다. 감정을 조절하려고 낭만을 불렀는데, 이제는 낭만이 나를 조절한다. 명확히 말하자면, 낭만을 찾는 루틴이 나를 조절해왔다. 새벽이 되면 찾고, 지치면 찾고, 멍해지면 찾고, 아무 이유 없이도 찾는다. 찾고 나면 잠깐 가벼워지고, 그 가벼움이 사라지면 더 깊게 가라앉는다. 가라앉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그래서 나는 더 자주 찾는다. 더 자주 찾을수록 더 허무하다. 허무할수록 분노가 따라붙는다.

"선생님."

아, 낭만닥터 씨. 왜요, 왜? 왜 괜히 힘줘서 부르고 그래요? 나 지금 오랜만에 자기반성 중인 거 안 보여요? 꾹꾹 눌러 쓰듯 힘주어 부르는 목소리에, 뭐라도 들킬 것 같아 급하게 대답한다.

"사실 이미 알고 계시죠? 분노가 하려는 말은 '파괴하라'가 아니라 '더 이상 파괴하지 말라'는 말이라는 걸요."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다. 하필 가장 피하고 싶던 이야기를 한다. 이 질문에 '안다'고 대답하면 내 루틴은 바로 파괴될 것이다. 낭만을 찾는 루틴이.

분노가 말한다. 낭만을 제자리로 돌려 놓으라고. 과장되지 않은 자리, 구원이 아닌 자리, 완벽의 도구가 아닌 자리. 그 자리로 되돌려 놓으라고.
분노의 옆에 선 중독이, 계약서를 들이민다. 이제 그만 우리의 계약을 파기하자고 말한다. 그만 소비해. 그만 도망쳐. 억지로 반짝임을 만들지 마. 네 감정에 값을 매기지 마. 네 삶을 보상으로만 환산하지 마. 누가 하는지 모를 여러 말들이 머릿속을 헤집는다.

찌익-.
분노가 쥐어준 힘으로 중독과의 계약을 찢는다.

낭만을 찾지 못해도 무너지지 않는 삶.
낭만 없이도 살아지는 하루.
보상 없이도 견디는 시간.
공허가 오면 공허를 통과하는 법.
불안을 무언가로 덮지 않고 함께 하는 법.

찢어진 계약서가 이런 단어들의 조합으로 부서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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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오
안녕하세요. 교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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