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사막에서 오아시스와 신기루를 구분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숨을 고를 수 있는지, 아니면 더 서두르게 되는지. 신기루는 사람을 재촉하고, 오아시스는 잠깐이라도 발을 멈추게 한다. 아마도 나는 그 차이에서 낭만을 대하는 태도를 배웠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시작은 의외로, 뜨거운 여름이 아닌 몹시도 추운 어느 겨울날이었다.
유난히 찬 공기가 도시를 눌러 앉히고 있었다. 바람은 얼굴을 베듯 스쳤고, 손끝은 장갑 안에서도 쉽게 풀리지 않았다. 몸은 계속 움츠러들었고 걸음을 멈출 때마다 추위가 더 깊게 스며들었다. 이런 날에는 생각이 단순해진다. 지금 이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 하나만 또렷해진다. 그래서인지 나는 더위를 상상하고 있었다.
햇볕이 쏟아지는 풍경, 숨까지 뜨거운 공기, 적당히 땀이 흐르는 몸. 실제로 겪고 있는 것은 한겨울의 냉기였지만 머릿속은 반대로 움직였다. 몸이 감당하지 못하는 감각은, 종종 반대편을 향해 그리움을 호출한다. 너무 추우니, 적당한 따뜻함이 아니라 극단적인 더위를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겨울보다 여름이 나은 것 같네. 더운 것도 싫지만 추운 건 도저히 못 참겠어."
참으로 박쥐 같은 말이다. 현재의 감각과 상황을 정리해 버리는 말. 이 감각을 설명하고, 이 순간을 견딜 수 있게 만드는 말. 이렇듯 단어는 빠르고 또 편리했다. 불편한 것을 마음껏 싫어할 수 있도록 만들어 버리는 단어들. 그리고 체온까지 바꿔버리는 마법 같은 말. 하지만 말 한마디가 몸을 데워주지는 않았다.
단어는 신기루처럼 움직인다. 확신을 주는 것 같았지만 추위는 그대로였고, 의미를 붙일수록 설명해야 할 것이 늘어났다. 설명할수록 말은 더 많아졌다. 계속 앞으로 움직여도 몸은 여전히 차가웠으나 그렇다고 신기루가 나를 멈춰 서게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아가게 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조금만 더 말하면 괜찮아질 것 같은 착각. 그 속으로 말이다.
신기루는 늘 이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힘든 걸 버틸 필요는 없다고 다독여 주는 다정한 얼굴. 하지만 그 말이 몸을 돌봐주지는 않았다. 몸을 따듯하게 해주는 게 아니라, 그저 추위를 정당화하게 만드는 것. 현재의 계절이 아닌, 언젠가 도착할 다른 계절을 가정함으로써 현재의 불편함을 참을 만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말. 그 말은 위로처럼 보이지만 그 속은 합리화에 더 가깝다. '지금'을 통과하지 않고 건너뛰기 위한 하나의 장치.
'모든 부담은 미래의 나에게로'
친절한 가면을 쓴 신기루의 행패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지금을 돌보지 않는다는 건 나중에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말과도 같다. 이깟 추위에 무슨 그런 거창한 해석을 붙이는 거냐고? 계절은 지나가면 그만인데 너무 거창한 거 아니냐고? 겨울에는 여름이 좋고, 여름에는 겨울이 그리워지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고? 신기루 덕에 여름을 상상하느라 잠깐이나마 추위를 잊었으니 오히려 럭키인 게 아니냐고?
마지막 질문, 그거. 그게 문제다. 신기루를 마구 쓰면 성냥팔이 소녀가 되는 수가 있다. 성냥을 켤 때마다 간절하게 원하던 환상을 보면서 행복해하지만... 결국 몸은 차게 식어가는 거다.
이렇게 열변을 토하는 건 사실 내가 신기루를 다루는 방식이, 그 동안 낭만을 사용했던 방식과 닮아 있어서다. 그리고 당신은 이런 과오를 범하지 않았으면 해서 하는 말인 거다.
지금의 상태를 견디기보다는 더 나은 장면을 상상하는 쪽. 여기에서 버티기보다는, 저기까지 가면 괜찮아질 거라고 믿는 쪽으로... 낭만은 그렇게 신기루가 되어 간다.
추위를 피해 현관문을 열었을 때, 몸은 식을 대로 식어 있었다. 외투에 묻은 찬기운을 털어내도 뻣뻣한 손끝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나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를 틀자 차가운 물이 먼저 흘러나온다. 손으로 온도를 가늠하며 잠시 기다린다. 물이 바뀌는 데에는 늘 시간이 필요하다.
이제 따뜻한 물이 올라온다. 손등을 감싸는 온도가 분명히 달라졌다. 찌릿함이 스쳤지만 그건 굳어 있던 감각이 풀리는 신호였다. 이제 손가락도 제 속도를 되찾았다. 두 손바닥을 모아 따뜻한 물을 한 웅큼 얼굴로 가져간다. 바람에 사정없이 맞은 뺨따귀도 사그라들었다. 그 순간에는 단어가 필요 없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하지 않아도 몸은 이미 반응하고 있었다. 더 이상 추위에서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상태. 그 상태가 조용히 유지되는 순간. 그게 오아시스처럼 느껴졌다.
'상상하는 모든 것은 현실이 된다.'
꿈꾸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신기루를 좇기보다는 오아시스에 도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신기루는 별로고 오아시스는 그럭저럭 괜찮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저 상상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말하려는 거다. 신기루는 '멈추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유혹하지만 그 어느 곳으로도 데려가 주지 않는다.
반대로 오아시스에 도달했다고 해서 행복한 결말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그곳에 안주하는 건 젖은 옷을 입은 채 나무 그늘 아래 멈춰 서 있는 것과 같다. 그늘 아래에서 옷은 마르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천은 몸에 더 밀착되고, 해가 지면 체온은 서서히 빠져나가 의외의 추위를 남긴다.
오아시스는 도착점이 아니다. 갈증이 완전히 사라지는 곳도, 길이 끝나는 지점도 아니다. 오아시스는 길 위에 있다. 잠깐 몸을 축이고, 다시 걸어야 하는 자리. 그러니 오아시스를 만났다고 해서 여정이 정리되지는 않는다.
신기루와 오아시스는 모두 상상에서 출발한다. 두 가지 모두 '지금 말고 다른 상태'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는 닮았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그 상상이 '지금'을 밀어내는지, 아니면 '지금'을 통과하게 하는지에 있다.
신기루는 '지금'을 대신한다. 현재의 고난을 삭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발명된 미래를 들고 오는 그것. 신기루는 늘 그런 방식으로 다가왔다. 지금의 추위를 언젠가 올 더위로 바꿔치기하고, 현재의 고통을 미래의 보상으로 상쇄하려 든다. 그래서 신기루는 언제나 현재라는 위치에서 나를 데리고 떠나려 한다. 몸은 그대로 둔 채, 생각만 앞질러 간다.
그러나 오아시스는 '지금'을 통과하도록 한다. 상상은 있지만 도망은 없어서 그저 경유할 뿐이다. 문제는 남아 있고, 길도 끝나지 않았지만, 나의 몸으로 잠시 숨을 고를 수 있게 만든다. 그러고는 다시 걸을 수 있는 상태로 돌려놓는다.
안주하거나 정착하려는 마음으로 주저앉지만 않는다면, 걷는 속도와 힘이 전과 다르다는 감각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낭만이 바로 여기에 있다. 신기루처럼 자신을 속이지 않으면서, 오아시스처럼 나를 잠시 살게 하는, 그런 상상이 존재하는 바로 그때 그곳. 거기에 낭만이 있다. 낭만은 상상이 '지금'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지 못하게 붙잡는 거니까.
별다른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삶에서 겨울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몸은 식고, 어떤 순간에는 버릇처럼 더 나은 풍경을 상상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마, 확실히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상상에 모든 걸 맡기진 않을 것이다. 상상이 나를 대신해 살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른 척하지 않을 거니까.
나는 그 '모른 척'을 단어로 덮어왔다. "괜찮아질 거야" "이 계절만 지나가면" 같은 말들을 반복했다. 말은 얇은 담요 같아서 체온을 만들지는 못한다. 말로 덮인 동안에도 몸은 계속 식어가고, 내일의 나는 더 차가운 몫을 떠안는다. 그래서 신기루 같은 낭만 말고 오아시스 같은 낭만에 대해 말하려면, 사실상 나는 제일 먼저 내 말의 습관을 고쳐야 한다.
쉽지 않다.
그래도 감히 말해본다.
낭만은 길 위에서 상상을 다루는 방식, 말이 나를 속이기 시작할 때 그것을 알아채는 감각, 그리고 잠시 멈춰도 다시 걸을 수 있다는 믿음의 형태다. 그 모습이 아마 오아시스의 형상을 하고 있을 터. 오아시스를 만나도 자신이 가야 할 길은 계속 이어진다. 낭만 역시 끝이 아니라 중간에 있다. 지나온 길과 지나갈 길을 지우지 않고, 얼어붙거나 녹아내리지 않도록 적당한 체온을 남겨주는 그 위치에.
나는 그 체온을 결코 신기루에게 맡기지 않겠다.
오늘의 몸이 먼저 살아 있어야, 상상도 제자리를 찾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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