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 좋은 계절
쓰기 좋은 계절
2025.11.10
admin·⌛9분

가을이 오긴 왔는데, 묘하게 찜찜하다. 낙엽은 단풍이 들기도 전에 시들고 떨어졌다. 바닥엔 넓고 단단한 낙엽 대신 마르고 비틀어진 나뭇잎들만 흩어져 있다. 바삭바삭하게 밟을 만한 게 없다.

계절의 변화가 매해 은근히 달라지고 있다. 그걸 집요하게 기록하는 사람은 없지만, 모두가 비슷하게 체감하는 듯하다. 이런 식으로 계속 가을은 짧아지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가을 같지 않은 기분으로 책장 정리를 시작했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글을 쓰다 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실감한다. 나는 A5 사이즈의 노트에 일기와 메모를 자주 남기는데 ‘매일 쓰기’ 같은 규칙은 없다. 그저 생각날 때마다 쓴다. 혼자 여행을 가면 더 자주 쓰게 된다. 그렇게 십여 년을 살다 보니 노트가 한 아름 안을 크기의 박스를 하나 채울 만큼 쌓였다.

일부는 타자로 옮겨놓고 버리지만,어떤 것들은 도무지 버리지 못한다.
손글씨로 쓴 예전 일기를 보면, 스스로 놀란다. 이건 내가 아닌 것 같다.
가끔은 5년 뒤의 나에게, 3년 뒤의 나에게 편지를 쓰곤 했다. 그런 글을 다시 읽으면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싶다.

얼마 전 대학 시절 동거하던 친구의 취업 기념으로 서울에 갔던 일이 떠오른다. 밤늦도록 예전처럼 떠들다 보니, 문득 “우리 알고 지낸 지 벌써 10년 다 돼간다”는 말이 나왔다. 그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대학생 버전의 너는 이미 죽었을 걸.”

인간의 세포가 7년마다 완전히 바뀐다는 이야기(가짜정보였다)가 있던데 하면서 “진짜 그런 거 같다, 예전의 우리가 아닌 거 같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 대화 후에 얼굴을 바라보니 정말 낯설었다.

“너 누구야.”

타인도, 나도 알게 모르게 변한다. 예전 여행일기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낙천적이고, 희망으로 가득 찬 아이였다. 미래의 나에게 편지를 쓰던 나는 진지하고, 리더십 있는 사람이었다. 과거에 쓴 글을 보면 ‘귀여웠네, 철없었네’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반대였다.
공책 너머 손을 집어넣고 그 시절의 나를 꺼내 멱살을 잡고 묻고 싶었다.

“야, 너 어떻게 그렇게 지혜로웠니? 빨리 비결 좀 알려줘.”

어떤 작가들은 시간이 흐른 뒤, 자신이 쓴 글이 정말 자신이 쓴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고 한다. 그만큼 사람은 쉽게 잊고, 과거의 나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많다. 글쓰기는 그런 점에서 현대에 남은 유일한 시간여행이다. 사진보다 더 생생하게,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느낄 수 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만나는 경험, 그 기분이 좋아서 글을 계속 쓰려 했다. 하지만 늘 실패했다.

2023년 딱 이 맘때 쯤, 나처럼 ‘글쓰기를 꾸준히 하고 싶은 목표가 있던’ 대학 선배와 메일을 주고받기로 했다. 그는 나이지리아 대사관에서 근무하는데 나이지리아의 삶과 대구의 삶을 나누며 일주일에 한 번씩 메일을 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이 약속도 두세 달 만에 흐지부지 끝났다.
그리고 2년이 흘러, ‘모각글’을 시작하면서 다시 용기 내어 메일을 보냈다. 이틀 뒤, 답장이 왔다. 그는 여전히 나이지리아에 있었다. 문자도, 카톡도, 영상통화도 가능한 시대지만 메일만을 주고받는 일에는 묘한 낭만이 있다. 답장을 하며 다시금 메일을 한창주고 받던 때의 기분 좋음이 밀려 왔다.

은근히 변해버린 가을처럼, 나도 그렇게 변했다. 겉모습 뿐만이 아니라 생각과 살아가는 방식이. 좋고 나쁨으로 단정 지을 수 없는 변화다. 대학 시절 교수님이 나를 두고 ‘돌다리를 열심히 두들기며 걷는 타입’이라고 했던 게 떠오른다. 교수님은 조심성있다는 데에 포인트가 있었던 거 같은데, 그런 것 같다. 나는 한걸음 걸을 때 마다 이 길이 맞는지 묻고 싶고 내일의 계획에, 다음 발걸음에 의미를 많이 두는 타입이다. 마음이 흐트러질 때 늘 중심을 잡아준 건 나였고 그건 현재의 '나'이기도 했지만 과거에 내가 써놓은 글 속의 나이기도 했다.

과거로 도망치는 퇴로를 만들자는 게 아니다. 글을 쓰고 지난 글을 돌아보며 사람이 변한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하루하루가 얼마나 귀한지 느끼게 된다. 만일 글쓰는 행위를 선전해야 한다면 나는 "은근히 달라지는 당신을 살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라고 말할 것이다.

내년 가을도 올 가을처럼 이렇게 짧을까? 하늘이 청명하고 낮 햇볕이 따뜻해서 피크닉하기 좋은 날씨. 사랑하는 이의 손붙잡고 두시간 쯔음 거뜬히 걸을 수 있는 기분 좋은 계절. 그리운 가을 냄새. 붙잡지 않으면 휘발되는 것들을 타자로 타박타박 쳐서 남긴다. 늘어나는 다른 짐들은 고민이지만, 노트만은 아니다. 두 번째 박스가 필요할 정도로 쓰고 또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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